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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D Dec 19. 2021

나는 살아있다

미드나잇 라이브러리- 매트 헤이그

자정의 도서관은 삶과 죽음 사이에 위치해 있다. 오늘과 내일 사이의 자정에 위치해 있다. 흑과 백 사이의 회색 지대에 위치해 있다. 자정의 도서관에는 노라가 있다. 죽으려고 하는 노라가. 그리고 책장에는 이름 없는 수많은 녹색 책들이 사라졌다가 새로이 생성되는 현상이 반복되고 있다. 이 책들은 노라의 삶이다. 노라가 갈망하는 삶이고 후회하는 삶이다. 무한한 선택의 파장이 만들어낸 무한한 삶이다. 하지만 노라는 그 어떠한 삶에도 만족할 수 없다. 왜냐하면 외로움과 절망, 두려움은 무척이나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노라는 모든 삶을 부정하고 있다. 그러자 자정의 도서관에 있던 녹색 책들이 전부 불타기 시작했다. 모든 가능성들이 소멸되고 있었다. 그리고 노라는 그 화마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노라는 고독감을 느끼고 있었다. 거머리처럼 마음속에 자리 잡은 너의 정체는 무엇이니. 노라는 자신이 문제인가 싶었지만 이내 고독감을 허용하지 않는 세상이 문제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예전에 밤이 되어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면 노라는 그 이유가 고독해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은 진정한 고독을 느끼지 못해서였다. 분주한 도시에서 외로운 마음은 어떻게든 다른 사람과 연결되기를 갈망한다. 마음은 인간과 인간의 연결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순수한 자연 안에서는 고독이 다른 성격을 띤다. 고독 안에서 자체적으로 연결이 이루어진다. 그녀와 세상이 연결되고, 그녀와 자기 자신이 연결된다.

온전한 존재가 아니기에 서로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세상 속에서 자신의 ‘쓸모’를 의심하던 노라는 죽음을 선택하고 자정의 도서관에서 마지막 기회를 맞이한다. 실존하는 곳이 아닌 자정의 도서관, 이 판타지 속에서 노라는 자신이 그럼에도 왜 살아가야 하는지 의문의 해답을 찾아 나선다. 바로 그녀가 살아보지 못한 모든 삶들을 살아보게 되면서. 펼쳐보지 못한 모든 녹색 책들, 가능성을 펼쳐보게 되면서.


그녀는 성공한 록스타의 삶, 흠모하던 이성과 결혼하는 삶, 어릴 적 꿈이었던 수영 선수의 삶, 관심 있는 분야였던 빙하 학자의 삶을 살아본다. 동시에 그녀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삶, 사랑이 식어버린 남자 친구와의 삶, 오빠가 죽는 삶, 건강이 나빠지는 삶도 살아본다. 만족스러운 삶을 찾게 되면 자정의 도서관에서 나와 그 삶에 머무르게 되는데 노라가 한 가지 삶에 정착할 수 없었던 것은, 아무리 호화롭고 멋진 삶이라도 그림자는 반드시 존재했기 때문이다.

실망과 단조로움과 마음의 상처와 경쟁만 한가득이고, 아름답고 경이로운 경험은 순간에 끝난다. 우리가 불행했던 이유는 무언가를 성취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애초에 성취하겠다는 기대를 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살다 보면 더 쉬운 길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십상이죠. 하지만 쉬운 길은 없을 거예요. 그냥 여러 길이 있을 뿐이죠. 매일 매 순간 우리는 새로운 우주로 들어가요. 자신을 타인 그리고 또 다른 자신과 비교하며 삶이 달라지기를 바라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죠. 사실 대부분의 삶에는 좋은 일과 나쁜 일이 공존하는데 말이에요.”

“삶에는 어떤 패턴이, 리듬이 있어요. 한 삶에만 갇혀 있는 동안에는 슬픔이나 비극 혹은 실패나 두려움이 그 삶을 산 결과라고 생각하기 쉽죠. 그런 것들은 단순히 삶의 부산물일 뿐인데 우리는 그게 특정한 방식으로 살았기 때문에 생겨났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슬픔이 없는 삶은 없다는 걸 이해하면 사는 게 훨씬 쉬워질 거예요. 슬픔은 본질적으로 행복의 일부라는 사실도요. 영원히 순수한 행복에만 머물 수 있는 삶은 없어요. 그런 삶이 있다고 생각하면, 현재의 삶이 더 불행하게 느껴질 뿐이죠.”

그림자가 없는 삶은 존재할 수 없었다. 만일 그런 삶이 있다면 그건 유령의 삶이었을 것이다. 노라는 자신의 무한한 삶 중 그런 유령의 삶을 살아보게 된다. 노라는 오로지 행복만이 가득한 삶으로 들어간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가 된 노라는 흠모했던 이성과 결혼하고 사랑스러운 딸과 함께 아늑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노라에게는 그들이 그렇게 살게 되기까지의 노력과 헌신의 기억이 남아있지 않았다. 분명 그러한 과정으로부터만 얻을 수 있는 지혜가 부재했던 그녀는 그 삶을 진정으로 살아내지 못한다. 그저 유령처럼 연기만 할 뿐이었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고난이었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북극곰이었다.


빙하학자의 삶에서, 그녀는 북극곰을 마주친다. 몇 겹의 장갑을 뚫고 들어오는 추위와 눈보라에 맞서 그녀는 북극곰을 내쫓으려 하지만 곰은 그녀의 위협에 아랑곳하지 않고 돌진해온다. 평소에 그렇게 죽고 싶어하던 그녀는 그 순간, 살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에 휩싸이게 된다.

포기하지 마라! 감히 포기할 생각은 하지도 마. 노라 시드!
록스타, 교수, 올림픽 출전 수영선수, 사랑하는 남자의 아내, 빙하 학자. 그들은 모두 그녀였다. 그녀는 그 모든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었고, 한때는 그 사실이 자신을 우울하게 만든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자극이 되었다. 왜냐하면 이제는 마음먹고 노력하면 해낼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이다. 가끔은 덫처럼 느껴지는 것이 그저 마음의 속임수일 수 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포도밭을 소유하거나 캘리포니아 석양을 봐야 할 필요는 없다. 심지어 넓은 집과 완벽한 가정도 필요치 않다. 그저 잠재력만 있으면 된다. 그리고 노라는 잠재력 덩어리였다.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것은 무력감 혹은 지나친 희망이었고, 우리가 삶을 열망하게 만드는 것은 고난을 이겨내겠다는 의지이자 본능이었다. 모든 녹색 책들, 가능성의 책들이 화염에 휩싸이고 노라가 무너져가는 도서관 한복판에 주저앉아 죽음의 문을 통과하려 할 때 그녀는 북극곰을 만났을 때와 비슷한 삶의 열망을 느끼게 된다. 만일 그녀가 살고자 한다면, 아직 타지 않은 녹색 책들 중 하나를 펼쳐야만 했다. 그녀는 아직 타지 않은 책 한 권을 찾아 펼친다. 책은 온통 백지였고 제목은 '현실'이었다. 노라는 책을 펼치고 적는다. 나는 살고 싶다고.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녀는 다시 적어본다. 나는 살 준비가 되어 있다고.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화염이 노라를 덮치기 직전, 그녀는 본능적으로 마지막 문장을 적어 내려 간다. 나는 살아 있다고. 그녀는 현실로 돌아왔다.

 

절망의 반대편에서 인생은 시작된다.
- 사르트르

절망의 끝자락에서 그녀의 삶은 다시 시작되었다. 현실은 아직도 팍팍하고 만족스럽지 않았지만, 이제 그녀는 현실을 살아갈 준비가 되었다. 자신 안에 있는 잠재력을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자신 안에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삶에는 다양한 음계와 곡조가 있었다. 그녀에게는 단지 번창하는 우울증과 절망감만 있는 게 아니었다. 노라는 그 사실에서 희망을 얻었고, 심지어 여기 있을 수 있다는 것에 진정으로 감사한 마음마저 들었다. 그녀는 빛나는 하늘과 재미없는 라이언 베일리 코미디 영화를 보고 즐길 수 있었고, 음악과 대화와 자신의 심장박동을 행복하게 들을 수 있는 잠재력이 있음을 알았다.

모든 것이 되기 위해 모든 일을 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무한하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동안 우리는 늘 다양한 가능성의 미래를 품고 있다. 그러니 우리가 존재하는 세상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친절하자. 가끔 서있는 곳에서 하늘을 올려다보자. 어느 세상에 서 있든지 간에 머리 위 하늘은 끝없이 펼쳐져 있을 테니까.

어제 나는 내게 미래가 없다고 확신했다. 도저히 내 인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어제와 똑같이 엉망진창인 삶이 희망으로, 잠재력으로 가득 차 보인다. 살아보지 않고서는 불가능을 논할 수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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