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을 쫙쫙 짜고 해. 안 그럼 차 지저분해져.
으엇, 차가워. 걸레를 물에 적시며 입술을 꽉 깨문다. 집 앞 수도꼭지가 얼어서 아빠는 양동이에 찬 물을 받아오셨다. 공원으로 함께 운동을 가기 전, 아빠의 세차를 도와주겠다고 나는 세차용품을 들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솔직히 돈 몇 천 원만 내고 주유소에 가서 세차 기계에 차를 밀어 넣어도 될 일인데, 아빠는 단 한 번도 그렇게 차를 청소하지 않으셨다.
막상 가보니 차는 무척이나 깨끗했다. 세차할 필요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을 정도로. 아빠, 세차할 필요 없겠는데? 빨리 운동 가고 싶은 마음에 아빠를 보채지만 아빠는 두꺼운 손을 휘휘 저으며 청소하고 가야 한다고 딱 잘라 말씀하신다. 아니, 그러기엔 차가 지저분하지 않은 수준도 아니고 반짝반짝 빛날 정도로 깨끗해서 그저 헛웃음만 나왔다. 오케이, 그래도 아빠 차인데 청소해야지. 난 아빠의 키가 닿지 않는 천장 위주로 걸레질을 했다. 걸레에는 먼지 한 줄 묻어 나오지 않았다. 이게 맞나.
우리 아빠 차는 산타페다. 그것도 구형 산타페. 산타페 주제에 옛날 차량이라 기어는 1종이다. 한때 랜드로버 차량을 갖고 싶다던 아빠의 눈빛이 문득 청소 중에 생각났다. 그럼에도 아빠는 어디 돈 쓸 데가 많으셨는지 지금까지 차를 바꾸지 않으셨다. 아빠가 바꾸지 못한 건 차 뿐만이 아니다. 아빠는 운동복도 10년 전에 입으셨던 옷 그대로이고, 술은 가끔, 담배는 일절 하지 않으신다. 패션에도 일체 관심 없으셨던 아버지를 지금처럼 만들어 준 것은 온전히 엄마의 공로였다. 문득 마음이 미어진다. 삼 남매 뒷바라지해주느라 아버지가 정작 스스로를 위해 뭔가를 해보지 못하신 것 같아서.
언젠가 엄마가 말씀하신 게 생각났다.
니네 아버지가 세차하는 거, 그건 리추얼이야. 외할아버지도 아빠 그런 부분은 인정하시잖아. 신서방 차 10년도 더 됐는데 무슨 새 차 같다고.
틈날 때마다 영어 공부하는 부작용으로 평소에 얘기할 때도 영어단어를 남발활용하시는 엄마는 의식이란 말도 영어로 표현하시며 일상 속 실습을 마다하지 않으신다. 난 더 이상 엄마와 아빠가 우리를 위해서가 아닌, 당신들 스스로를 위해 뭔가를 했으면 좋겠는 마음에 엄마의 그런 노력들을 더욱 지지해주고픈 마음이다. 그리고 나도 인정한다. 아빠 차는 정말 지금도 새 차같다. 주변에 지나다니는 먼지 자욱이 쌓인 차들과 비교해보면. 명절 때도 빼놓지 않고 아침마다 세차를 하시는 아버지를 보며 외할아버지 역시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말씀하셨다. 저런 습관들을 꼭 본받으라고. 돈보다도 귀한 재산이라고.
이번에 집에 와보니 탁자에 못 보던 공책 세 권이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신경 안 썼겠지만 공책들이 헤질 대로 헤져 종이 낱장들을 붙잡아주지 못할 정도였다. 궁금해서 펼친 공책에는 아빠가 매일 달리기를 하던 기록들이 한 줄씩 적혀 있었다. 1993년, 누나가 태어난 해부터 시작된 아빠의 달리기 기록은 불과 엊그제까지 계속되고 있었다. 달리지 못하는 날에는 감기몸살, 무릎 부상 등 사유를 명확하게 적어놓으신 채.
이 공책을 본 후 아빠가 세차를 하는 마음가짐에 대해 한 번 생각해본다. 다른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빠는 당신 스스로를 위해 이렇게 달려오셨다. 25년 동안 내게 이 공책들을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것처럼. 세차도 마찬가지이다. 아빠는 휴일에도 아침 운동하러 나갈 때마다 항상 걸레를 가지고 나가셨다. 차가 며칠 동안 주차장에만 있는 날에도 아빠의 차는 항상 깨끗했다. 계속 이렇게 달려오신 건가. 기회를 잡기 위해. 인생의 타이밍을 놓치지 않기 위해. 준비된 자가 기회를 잡는다는 말처럼, 아빠는 너무도 준비를 잘해놓으셨다.
함께 운동을 하러 공원에 가는 길, 아빠는 요새 무릎이 안 좋아서 뛰지 않고 걷기 운동만 하신다. 옛날에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항상 뛰셨는데. 어릴 때 같이 운동을 갈 때면 아빠의 달리기가 끝날 때까지 하릴없이 바닥에 주저앉아 기다리곤 했었는데. 1시간 정도 달리기를 하고 돌아와 보니 이제는 아빠가 벤치에 앉아서 날 기다리고 계신다. 마음만큼은 얼마나 뛰고 싶으실까. 아버지의 눈빛에서 절로 읽힌다. 지금 내 젊음을 얼마나 부러워하고 계시는지. 내 찰나의 젊음을 절반 주고서라도 아빠와 함께 달리고 싶은 심정이다. 이렇게나 준비되어 있는 사람에게 누가 기회를 주지 않으리. 내 젊음 또한 영원하지 않고 하루하루 소멸되고 있다는 말로 아빠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을 전한다. 그만큼 열심히 제대로 살아내겠다고, 주먹을 불끈 쥐고 다시 한번 다짐한다.
저녁 바람이 불 무렵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아빠가 속마음을 내비친다.
이제 내 차가 내년이면 판매가 끊긴대. 그럼 잘 관리했다가 나중에 시간 지나고 나서 뭐 수집가 이런 사람들한테 팔면, 넉넉잡아 1억 정도는 받을 수 있을 거야. 그럼 그 돈으로 랜드로바 사야지.
아빠, 그럴라고 지금까지 열심히 차 관리하신 거예요?
고개를 끄덕이시는 아버지. 절대 안 팔릴 거 같은데. 내가 중얼거리자 아빠는 "뭔!" 눈을 부릅뜨며 날 노려보신다. 길가에 포르셰 한 대가 지나간다. 나랑 아빠는 말없이 가던 길을 계속 걷는다.
에으, 아빠 차가 훨씬 명품 차다.
다시 한번, 눈을 부릅뜨며 기다렸다는 듯 대답하시는 아버지.
그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