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세우스의 배
공부할 때 샤프심을 자주 부러뜨리곤 했다. 손에 힘을 주고 글씨를 쓰면 샤프의 압력이 종이를 눌러 공책이 올록볼록해졌다. 그렇게 공책을 빼곡히 채우고 나면, 종이의 올록볼록함으로 인해 공간감이 생겨 공책이 두꺼워졌고 그럴 때마다 나는 자랑삼아 공책을 챱챱 흔들며 친구에게 자랑하곤 했다. 이것 봐, 걸레짝. 마치 그게 내 열정의 증거라도 되는 것처럼. 같이 공부하던 친구는 내가 손에 힘을 주고 쓰는 걸 신기해했다. 친구는 글씨를 살살 썼다. 그리고 시험은 친구가 더 잘 보곤 했다. 그땐 몰랐지. 힘을 주지 말아야 자유자재로 방향을 잘 틀 수 있을 줄은. 열정이 유연한 사고에 방해가 될 줄은.
누군가를 이끌어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한두 명 정도야 모르겠지만 30명의 요구사항을 다 들어줄 순 없는 일이었다. 다수의 이익은 서로 상충되는 경우가 있기에, 목표에 최대한 근접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강제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강제가 다수에게 이해되기 위해서는 결정이 가볍고 간단해야 했다. 단, 세부사항만큼은 꼼꼼히 알고 있다는 가정 하에. 골똘히 고민해서 도출하게 되는 판단이라면, 내 경험상 그건 좋은 판단이 아니었다. ‘골똘히’라는 단어 속에는 저울질이 있었고, 부끄럽지만 돌이켜보면 그 저울에는 종종 편견이나 편애가 올려져 있었다.
때로 각 잡고 시작하는 일들은 잘 안 풀리곤 했다. 반면 별생각 없이 시작한 일들이 의외로 잘 풀리기도 했다. 글을 쓸 때도 그랬다.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총동원해서 멋진 글을 쓰고자 하면 글이 잘 써지지 않았다. 반면 머리를 비우고 어딘가에서 날아오는 생각의 끈을 쫓다 보면 꽤 마음에 드는 글이 나오곤 했다. 새로움은 오래 축적된 생각의 보따리에서 나오지 않았다. 생각을 비울 때 새로움이 들어올 자리가 생겼다. 생각을 비울 때 비로소 내 주변에서 조화를 찾을 수 있었다.
방 청소할 때를 생각해본다. 한 번 사놓은 건 당장 쓸모가 없더라도 언젠가 쓸모가 생길 거라는 엄마의 신념 아래 살아와서 물건들을 잘 버리지 못하곤 했다. 하지만 요즘 청소를 하며 느끼는 건, 방 정리의 알파는 ‘정리하기’가 아닌 ‘버리기’라는 것이다. 정리할 물품들을 최소화하는 것, 그게 방 정리의 핵심이었다.
버리기 방식의 방 정리는 때로 내가 원하는 성장과 닮아 있었다. ‘테세우스의 배’라는 역설이 있다.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죽인 테세우스가 아테네로 귀환한다. 아테네인들은 그의 배를 오래 보존하기 위해 썩은 판자들을 떼어내고 그 자리에 새 판자들을 끼워 넣는다. 그들은 그렇게 배의 모든 부품들을 갈아 끼우게 된다. 그러면 그 배는 여전히 테세우스의 배일 수 있을까.
마치 테세우스의 배처럼, 때로는 내게 내재된 수많은 특질들을 버려야 했다. 목표를 위해 가끔은 쓴소리도 할 줄 알아야 했고 내가 속한 팀이 손해보지 않기 위해 종종 이기적으로 굴어야 할 때도 있었다. 그런 과정 속에서 오는 죄책감을 굳이 떨쳐내진 않았던 것 같다. 테세우스의 배와는 달리, 그 죄책감 덕분에 내 색깔을 조금이라도 지킬 수 있었으니까.
마찬가지로 우리 몸의 세포 대부분도 7년을 주기로 죽고 생기기를 반복한다고 한다. 내 겉모습은 변하지 않지만 날 구성하는 세포들이 전부 바뀐다면, 7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같은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 내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이렇게 도태된 세포들을 계속 교체해야 하는 거라면, 그건 어쩌면 다시 태어나는 일일 수도 있었다. 알을 깨는 일일 수도 있었다.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만일 내가 정상에 오른다면, 그곳에 계속 위치하기 위해 가진 것들을 변함없이 지녀야 할 줄 알았다. 그니까 난 그동안 그걸 고려하지 못했던 것이다. 엔트로피의 법칙을. 변함없는 모든 것들은 부패한다는 사실을. 부패를 막고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버릴 건 버리고 그 자리를 새로움으로 채워야 한다는 사실을. 그게 바로 정상을 유지하는 방법임을.
유지도 못할 거면서 성장하길 바라는 건 욕심이었다.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오르막길을 생략한다는 것은 욕심이었다. 짐이 많을수록 오르기 힘들어진다. 어쩌면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배우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느 정도의 열정을 버리고 냉정함을 되찾는 것. 몸에 힘을 좀 풀고 민첩해지는 것. 미래에 대한 걱정을 떨쳐내고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것. 소중한 것들에 대한 정을 조금 내려놓고 현실성 있는 판단을 내리는 것. 하나라도 더 배울 시간에 기존에 가지고 있던 지식들을 재정립하고 다듬는 것. 때로는 새로움만 받아들이느라 기존의 것들이 유실되지 않도록. 태어날 때만 알을 깨는 것이 아니다. 이건 끊임없이 알을 깨는 일이었다. 성장을 위해서는 끊임없이 나를 변화시켜야 했다. 끊임없이 다시 태어나야 했다.
하지만 비워내는데도 끝까지 남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버리려야 버릴 수 없는 것들, 없애려야 없앨 수 없는 것들. 변화의 과정에서 종종 느끼게 되는 죄책감들. 때로 이기기 위해 마음에 증오의 가시를 품을 때도, 내 영역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소진시킬 때도 조금의 선함이 남아있을 수 있던 것은 내 선택이 아니었다. 그건 믿음이었던 것 같다. 날 붙들어주던 죄책감, 그건 불가항력적인 믿음이었다. 선함이라는 것이 당장 내게 손해를 주더라도, 세상은 언제나 그런 선함으로 인해 숨 쉴 수 있을 거라는 믿음. 그래도 세상 아직 살만하다는 말은, 그런 선함으로 인해 나오는 말이라는 믿음. 그것이 언제나 나와 함께 항해하는 테세우스의 배가 될 거라는 믿음. 그 믿음이 때로는 모습을 바꿀지라도, 희망이 때로는 절망의 얼굴을 하더라도, 그 배는 여전히 내게 테세우스의 배일 거라는 믿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