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끝의 온실- 김초엽
이 소설을 쓰며 우리가 이미 깊이 개입해 버린, 되돌릴 수 없는, 그러나 앞으로 계속 살아가야 하는 이곳 지구를 생각했다.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세계를 마주하면서도 마침내 그것을 재건하기로 결심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아마도 나는, 그 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던 것 같다.
- 작가의 말
이 책을 읽고 찾아봤던 것 같다. 우리가 지나치게 개입해버린 지구의 지금 모습은 어떨지. 때로는 멀리서 보아야 더 잘 보일 때가 있는데, 지구는 그렇기엔 너무 가까워서. 지난 백 년 동안 상승한 지구의 온도는 지난 천 년 동안 상승한 지구 온도의 폭을 넘어섰다. 그 결과 우리는 백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형태의 자연재해들을 거의 매년 경험하고 있다. 자연재해는 마냥 천재지변이 아니었다. 바다의 산성화와 미세 플라스틱 조각들은 수많은 해양 생물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경제의 성장 속도는 빨라지고 산업 규모는 점점 거대해지고 있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우리가 지금처럼 환경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당장 우리 세대 혹은 우리 다음 세대에 사회 제반을 구성하는 인프라가 무너질 수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자원은 한정되어 있고, 우리는 전보다 빠른 속도로 그걸 소진시키고 있기 때문에. 화석 연료로 지금의 신화를 살아온 우리가 대체 에너지를 적극적으로 도입하지 않는다면, 조금의 경각심도 가지지 않는다면, 우리의 미래는 소설 속 이야기처럼 한정된 자원을 앞에 두고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근데 사실 내가 경각심을 가진다고 해도, 아니 우리 모두가 경각심을 가진다고 해도 이미 오염된 환경을 되돌리기엔 너무 늦어버린 게 아닐까 싶다. 작은 물방울이 바다를 이룬다지만, 사실 물방울이 가진 힘은 너무도 미미하다. 전체 온실가스의 80%가 인류의 10%에서 나온다고 한다. 거대한 자본을 움켜쥐고 있는 이 10%의 사람들이 조금만 에너지를 절약한다면 당장 내일이라도 전 세계에서 배출되는 하루치 온실가스를 1/3 줄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나 혼자 정신 차린다고 해서 해결될 환경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상위 10%를 제외한 나머지 90%의 인류가 전부 온실 가스를 줄이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고 해도, 우리는 전체 온실가스의 20%만 겨우 줄일 수 있을 뿐이다. 기적조차 별 볼일 없게 되어버릴 정도로 우리는 이미 충분히 환경을 망가뜨렸다.
이 책 역시 망가진 지구를 구원할 존재가 인류라고 얘기하지 않는다. 이 책은 자연이 주는 치유에 초점을 맞춘다. 그동안 우리가 착취해온 자연이 실은 지구의 환경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지대한 역할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가 동물이기 때문에 그동안 얼마나 식물을 등한시해왔는지도.
당신은 재건의 역사를 식물들의 관점에서 재구성해보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그 작업이 수행되지 않았다는 점이 놀라울 정도입니다. 인류는 그간 얼마나 인간 중심적인 역사만을 써온 것일까요. 우리는 동물을 과대평가하고 식물을 과소평가합니다. 동물들의 개별성에 비해 식물들의 집단적 고유성을 폄하합니다. 식물들의 삶에 가득한 경쟁과 분투를 보지 않습니다. 우리는 피라미드형 생물관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꼭대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완전히 반대로 알고 있는 셈이지요. 인간을 비롯한 동물들은 식물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지만, 식물들은 동물이 없어도 얼마든지 종의 번영을 추구할 수 있으니까요. 인간은 언제나 지구라는 생태에 잠시 초대된 손님에 불과했습니다. 그마저도 언제든 쫓겨날 수 있는 위태로운 지위였지요.
-목격자의 편지
나노 입자를 실험하던 연구소에서 입자의 자가 증식 속도를 제어할 수 없어 급속도로 지구를 휩쓸어버린 ‘더스트’. 피폐해진 세상 속에서 앞서 말한 10% 같은 사람들은 돔을 설치해 간신히 연명했고, 돔에 거주하지 못하게 된 수많은 사람들은 목숨을 잃었다. ‘더스트’에 내성이 있는 사람들은 돔 밖 황폐화된 90%의 대지에서 찌꺼기 같은 자원을 차지하기 위해 기꺼이 인간성을 포기했다. 당장 내일을 살기 위해, 보잘것없는 영양캡슐을 확보하기 위해 그들은 서로를 죽였고, 내성종들이 어떻게 더스트에 내성을 가지는지 알아내기 위해 생체실험을 마다하지 않았다.
사실 이 소설은 인류가 어떻게 ‘더스트’라는 재앙으로부터 살아남았는지를 다루는 이야기가 아니다. 소설 초중반부에 이미 인류가 더스트를 극복하고 세상을 재건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결국 작가가 이야기에 중점을 두고 싶어 하는 건 재건된 세상이라는 결과가 아니었다. 누가 어떻게 세상을 재건했는지 그 진위를 가려내려는 것이었다. 그저 해피엔딩으로 그칠 문제가 아니라 어떤 역사가 기록되어야 하는지의 문제. 이 소설은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그 간단하고 정당해 보이는 논리 속에 사라져 버린 재건의 진짜 주역들, 이름 잃은 그들을 조명하기 위한 이야기인 것이다.
재건 이후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연구원들이 ‘더스트’ 입자의 디스어셈블러, 즉 ‘역 더스트’를 개발해 세상을 되찾았다고 굳게 믿는다. 사실 이는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들은 기술로 인한 재앙을 다시 기술로 되돌렸다. 기술은 우리에게 악하기만 한 존재가 아니다. 기술은 우리를 일으켜 세우고 때로는 무너뜨리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소설 속 인류가 아는 역사는 결국 승자의 기록, 기존 패턴의 반복이었고 작가는 이를 전면으로 부정하고자 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혹은 깨달아야 할 중요한 근본이 누군가가 정의 내린 기록 속에 묻혀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저 암흑시대에 잠시 칭송을 받은 마녀일 뿐이었어요. 과학이 어두운 세계에 불을 밝히면서, 우리는 무대 뒤로 물러나야만 했지요.
그리고 작가가 얘기하는 그 근본은 바로 식물이었다. 눈에 띄지 않는 그 미미한 존재가 지구에 미치는 자연 치유적인 힘. 어쩌면 재앙의 사회를 다시 살리는 지구의 마음. 절망의 나락에 떨어진 누군가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우리의 마음. 자신의 망가진 몸을 고쳐주는 지수를 필요로 했던 레이첼처럼. 세상을 재건할 식물을 재배하는 레이첼을 필요로 했던 지수처럼. 더 많이 가지기 위해 싸우고 다투는 마음이 아니라 각자가 가진 능력을 서로에게 베푸는 마음이 가진 힘에 대해 작가는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 마음이 서로를 지탱할 거라는 걸. 망가진 세상을 재건할 거라는 걸.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에요. 저는 그냥 그곳에서의 약속을 지키고 싶었던 거예요. 프림 빌리지를 다시 만들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해서 식물들을 심었어요. 오직 그것만이 저를 살아가게 했으니까요.
맞아요. 당신들이 약속을 지켰고, 세계를 구한 거예요.
조명받지 못한 모든 주역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워낙 시각적인 자극에 영향을 많이 받기에, 동물의 역동성에 의해 가려진 식물의 느리고 조화로운 그 힘을 인지하지 못하고 살아온 지난날에 대해서. 움직이지 않는다고 예쁜 꽃들을 함부로 꺾고, 보이지 않는다고 에너지를 낭비하던 지난날에 대해서. 보이지 않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도 모르고.
역사 속에서 이름이 지워졌다는 과거의 수많은 과학자들. 세라피움이라는 이름을 가진, 당시 잊혀진 과학자들이 남겼다는 그 기록 보관소가 불에 타고나서 과학의 발전은 몇 세기 동안 지체되었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탄압받던, 지동설을 포함한 그 모든 과학 이론들. 허무맹랑하다고 비웃는 태도는 또 어떤 중요한 진실들을 은폐할까.
우리가 당연시하게 여기는 그런 모든 일들. 지금까지 이렇게 해왔으니까 괜찮을 거라는 그런 생각들. 얼마나 안일한 태도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그런 태도들이 당장 내일이라도 수많은 동식물들, 그리고 우리들 스스로를 벼랑 끝으로 내몰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