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브와 아담
필명은 내게 있어 자랑스러운 존재이자 부끄러운 존재이다. 왜냐하면 이건 내가 원하는 이상적인 내 모습을 상정해놓는다는 의미인 동시에, 현재의 스스로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내 본모습에 정말 백 퍼센트 만족한다면, 필명 따위 필요하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내 필명인 ‘이브와 아담’은 내가 목표로 하는 존재이자, 그만큼 지금의 내 모습과 동떨어져 있다는 치부이기도 하다.
사실 꽤 오래전부터 이 필명을 사용했다. 중학생 시절 네이버 블로그에 글을 썼는데, 그때 내 닉네임이 이브와 아담이었다. 당시 난 블로그의 첫 포스팅에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파피용]을 다루었다. 꽤 유명한 소설이라 알 만한 사람들은 알겠지만, 소설의 주인공이 바로 ‘이브’다. 프랑스의 유명 만화가 뫼비우스가 그린 멋진 삽화가 소설 중간중간에 들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소설 중반부까지 주인공 이브가 ‘여자’인 줄 알았다. 왜냐하면 당연히 그런 줄 알았으니까. 성경에서는 아담이 남자, 이브가 여자였으니까. 고정관념에 빠져 이야기의 색깔을 잘못 인식한 것이다. 줄거리 자체도 놀라웠지만, 주인공 성별을 잘못 인식한 것도 내게는 개인적으로 줄거리 못지않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건 마치, 망치로 머리 한 대를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당연한 걸 당연하지 않게 보기 시작한 때가. 발상의 전환은 내가 소설을 올바르게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돌이켜보면 그때 이런 바람이 무심결에 생긴 것 같다. 덕분에 내가 소설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었던 것처럼, ‘생각의 전환’이 내가 세상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날 소개해주는 이런 필명과 문장들은, 내가 그것과 정반대인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브와 아담’은 지금의 내 모습이 아니니까. 내가 목표로 하는 모습이니까. 때로 난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그릇된 결정을 내리고 타인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는 사람이니까. 내 생각은 장전된 총이고, 내 혀는 쉽게 방아쇠가 되곤 한다. 나는 언제 ‘아담과 이브’라는 순서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까. 언제 ‘이브와 아담’이라는 순서에 익숙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내 필명을 종교적 의미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곤 했다. 종교는 분명 누군가에게 든든한 기둥이 되어줄 수 있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감옥으로 다가왔다. 성경이 명령하는 여러 교리와 계명들은 어린 시절의 내가 자유롭게 사고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생각의 감옥에 빠진 어느 사람들은 성경의 앞 뒤 맥락 다 자르고 단 하나의 문장을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자신의 처지에 유리하게 이용하기도 했다.
그래서 내 필명은 일종의 다짐이기도 하다. 언젠가 관념의 감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 열쇠를 찾아 문을 열고 나갈 거라는 다짐. 감옥에서 나와 더 넓은 시야로 세상을 보겠다는 다짐. 무엇보다 감옥과 세상을 구분할 수 없게 되었을 때, 필명은 신념에 사로잡힌 내 사고를 다시 일깨워줄 것이다. ‘이브와 아담’은 내게 있어 고정된 틀을 깨부숴줄 수 있는 망치다. 낡은 생각을 불태우고, 그곳에 새로운 생각의 씨앗을 심을 토양을 마련해줄 수 있는 한 줌의 불씨다.
앞으로 난 어떠한 방식으로든 계속 글을 쓰게 될 것 같다. 내게 있어 글은 스스로의 생각과 행동을 지속적으로 돌아보고 문제점을 고쳐나갈 좋은 방법, 혹은 유일한 방법이다. 앞으로 나아가려다 다시 뒤로 끌려간다면, ‘너 지금 뒤로 끌려가고 있어’ 라고 일깨워줄 수 있는 장치이기도 하다.
혹시 내가 글쓰기를 그만두는 날이 온다면, 그날이 바로 내가 ‘이브와 아담’이 되는 순간일 것이다. 그날이 언제 올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죽을 때까지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적어도 지금의 내가 생각하기에 확신으로 가득한 삶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삶이 내게 시련을 준다면, 난 내가 ‘아담과 이브’라는 순서에 갇혀 낡은 생각들과 함께 살아가지 않을 것이란 확신을 할 수 없으니까. 그럴 때마다 나는 글을 적어나갈 것이다. 남들이 보기에 지난하고 의미 없는 과정일 수 있겠지만, 언제나 나아갈 방향이 있다는 건 좋은 거니까. 글을 적어나가는 그 찰나의 순간에라도 ‘이브와 아담’이 될 수 있다면, 난 그걸로도 족하니까. 글을 적는 이 고요한 시간 속에서 ‘나’라는 세상을 사유하는 그 감각은, 내 마음의 광야에 새로운 씨앗 하나를 심어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