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인사
용기였을까, 오만이었을까. 내 성향과 맞지 않는 길을 굳이 선택한 것은. 보통은 수많은 고민 끝에 선택을 한다지만, 난 선택을 먼저 하고 그 선택에 대한 이유를 나중에 찾곤 했다. 그토록 충동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내 선택에 대한 믿음을 무의식적으로 가지고 있었다. 의식적으로는 항상 스스로를 의심했는지 몰라도. 말로 설명할 순 없었지만, 내 선택에 응당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남들처럼 대단한 결심을 하고 장교의 길을 걸은 건 아니었다. 충동적인 선택 이후 나름대로 붙였던 변명에 의하자면, 나는 스스로를 바꿔보고 싶었다. 언제나 세상과 타인에 무관심하고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살던 내가 누군가를 이끄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는 건, 말 그대로 나를 바꿔야 하는 일이었다. 그것도 아주 정반대의 방향으로. 처음엔 막연히 생각했다. 나 엄청 힘들겠구나. 시간이 지나 중간엔 힘들다는 사실을 깨닫지도 못할 만큼 정신없었던 것 같다. 힘들다는 생각보다 '나 엄청 부족한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고, 그게 항상 날 움직일 동력이 되어줬다. 그리고 지금 종착점에 도착하고 나서는 이런 생각이 든다. 꽤 힘들었지만, 그게 좀 그립다고.
만일 시간을 과거로 돌릴 수 있다면 나는 다시 이 길을 선택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러지 않을 것이다. 남들보다 조금은 길었던 군생활 기간이 지금까지도 아깝다. 차라리 그 시간에 진짜 내 목표를 위해 조금이라도 더 투자했으면 난 지금보다 더 앞서 있었을 텐데. 어차피 직업군인 할 것도 아니면서. 하지만 지금에 와서야 느끼는 이 모든 감정과 교훈들은 어쨌거나 내가 종착점까지 와야 경험할 수 있는 것이었다. 앞으로도 명심해야겠다. 끝을 보지 않으면 후회할 자격도 없다.
내게 더 나은 선택지가 있었을 거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시간을 돌린다면 난 이 길을 선택하지 않을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길을 걸어온 걸 후회하지 않는다.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찾기 위해 여행을 하는 거라면, 군대도 내게는 일종의 여행이었다. 단지 난 군대에서 내 새로운 모습을 찾은 게 아니었다. 군대에서 목격한 내 모습은, 공간이 마땅치 않아 발현되지 않았을 뿐이지 언제나 내 안에 내재되어 있던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어리석고, 어리숙하고, 이기적이고, 예민하고 때로는 악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부끄럽지만 스스로를 이성적이고 관용적이고 인내심이 깊은 사람이라 여기곤 했는데, 그 생각이 무색할 정도로 나는 군대에서 다른 사람이었다. 낯선 장소에서 마주하게 된 진실이, 그 본모습이 내 생각과는 너무 달랐다. 그 괴리감이 좀 힘들었다. 나 때문에 마음의 벽돌을 한 층 더 쌓은 사람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햇살같이 웃어줬던 사람들, 무척이나 미안하고 무척이나 고마웠다.
그래도 이 경험이 내가 향후 어떠한 선택을 하는 데 있어 커다란 통찰을 제공해 줄 거라는 생각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자는 생각으로 이 길을 선택했지만, 약점을 보완하는 것보다 강점을 살리는 쪽이 더 좋은 전략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 발 담그고 싶은 분야에 도전장을 내민다면, 그 분야는 자신의 특출난 부분과 공명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육식 공룡의 턱과 이빨은 무척이나 발달했지만 앞다리는 별로 발달하지 않았다. 내 군생활은 마치 육식 공룡의 앞다리를 발달시키는 일이었다. 그래서 시간을 돌린다면 이 길을 선택하지 않을 거라 말한 것이다. 시간을 돌린다면, 난 내 턱과 이빨을 발달시키기를 선택할 테니. 하지만 모든 노력에는 보상이 따르고, 덤으로 추억도 따른다. 요즘 그 추억이 무척이나 그립다. 헝클어진 머리와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머금고 훈련해도 웃을 수 있었던 건 함께했던 사람들 덕분이었고, 정신적으로 버티기 힘들 때 견딜 수 있었던 건 동료의 따뜻하고 사려 깊은 말 한마디 덕분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자기 안의 무언가를 서로 조금씩 주고받으며 지우고 싶지 않은 얼룩들을 남겼다.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교, 그리고 군대까지 끝마치고 나니 이제 날 가로막는 사회적 인프라가 사라졌다. 자아실현을 목전에 두고 날 조금이라도 방해할 수 있는 사회적 장치가 처음으로 전무하다. 이젠 내 선택 하나로 모든 행로가 결정된다. 무한한 자유와 무한한 책임이 나와 함께하고 있다. 그래서 설레는 동시에 조금은 두렵다. 왜냐하면 지난 4, 5년간 열심히 발 담갔던 분야를 잠시 잊고 새로운 걸 도전해보길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앞다리를 보완하기보다 턱과 이빨을 좀 더 발달시키길 선택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언제나 하고 싶어 하던 일을 해보기로 결심했다.
빙빙 돌아 이제야 시작해보는 게 조금은 아깝긴 하지만, 지난 경험들이 향후 내 앞길에 커다란 도움이 될 거라 확신한다. 경험해보지 않았다면 언제나 몰랐을 테지만, 적어도 이제는 알고 있으니까. 경험해봐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분명 있으니까. 그러니 후회 따윈 하지 않을 테니까. 이건 시작도 끝도 아니다. 변화를 유도하는 새로운 목소리다. 난 반드시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