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5박 6일간의 멕시코시티 일정을 마무리하는 날이다. 내일 아침 일찍 댈러스로 향하는 비행기를 타야 하기에, 마지막 날은 아직 가보지 못한 폴랑코 구역의 박물관과 미술관을 둘러보기로 했다. 사실 여행 중반까지만 해도 멕시코시티에서만 5박을 보내는 것에 대해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일정을 짧게 잡고 그 유명하다는 칸쿤으로 넘어갔어야 했나' 하는 후회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멕시코시티에는 한국 사람도 별로 보이지 않았고, 다들 칸쿤에서 편안하게 아름다운 자연과 수영을 즐기고 있을 것만 같았다. 고생하며 멕시코의 역사와 문화를 깊이 알아서 무엇하나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특히 여행 첫날, 센트로 지역을 돌아보며 느꼈던 실망감은 컸다. 너무 많은 사람과 정신없는 거리, 어딘지 모르게 우리나라 80년대를 연상시키는 풍경들을 보며 '정말 왜 여기까지 왔나'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었다. 이것이 5일 반복되었으면 실망이 계속 실망으로 마무리되었을 것 같은데 5일간 멕시코 시티는 나에게 다양한 맛을 선사했다.
오늘은 아침 일찍 '국립 인류학 박물관'으로 향했다. 이곳은 라틴아메리카 최고의 인류학 박물관으로, 60만 점에 달하는 유물이 총 23개의 전시실에 시대별, 문명별로 보관돼 있다. 규모가 매우 크고 넓기 때문에 종일 보아도 다 못 볼 정도다. 평일 아침임에도 단체관광객과 체험학생 나온 학생들 줄로 박물관은 이미 활기를 띠고 있었다. 가방은 보관소에 맡기고 입장권을 사려는 데 카드가 안되어 급하게 다시 가방을 찾아서 현금으로 계산했다.
박물관 입구에 들어서니 대형 분수가 나타났다. 거대한 기둥을 중심으로 천장에서 많은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빨랭게의 '생명의 나무'를 모티브로 하였고, 대리석으로 조각된 이 기둥엔 재규어와 태양의 신 등이 그려져 있다. 아들이 신기해서 분수의 물줄기 사이를 통해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멀리 있던 경찰이 이를 보고 소리 질렀다. 들어가면 안 된다고 하는 것 같았다. 급하게 아들을 나오라고 했다. 경찰은 우리와 아들을 부르더니 신발에 묻은 물기가 내부로 옮겨지니까 밖에서 10분 동안 말리고 들어가라고 했다. 아이는 강한 어조에 매우 긴장해서 말을 못 하고 우리가 주의를 주겠다고 죄송하다고 연신 말했다.
중앙 분수를 중심으로 반시계 방향으로 이어지는 전시는 인류의 역사를 시대순으로 잘 보여주었다. 원시 시대의 루시와 호모 사피엔스부터 빙하기의 대이동을 지나 테오티우아칸 전시실에 다다랐다. 며칠 전 보았던 것보다 장식 복원이 더 크게 되어 있었고, 이미 테오티우아칸에 다녀온 상태라 이해가 더 수월했다. 우리가 본 부분은 일부였고, 완벽히 복원된 미니어처 모습을 통해 당시 도시의 규모가 예상보다 훨씬 컸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보충 수업을 받은 것처럼 실제 유적을 봤을 때 잘 몰랐던 부분을 알 수 있었다.
아즈텍 전시관에서는 압도적인 크기의 석상들과, 전시의 중심에 놓인 ‘태양의 돌’이 가장 먼저 시선을 끌었다. 일부러 힘을 준 듯한 규모와 배치는, 이 유물이 단순히 중요한 유물이라기보다 이 문명과 나라를 상징하는 핵심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태양의 돌' 앞에는 유난히 사람이 많았고, 모두가 홀린 듯 수시로 멈춰 서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차례를 기다리며 자연스럽게 그 주변에 체류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설명을 읽지 않아도, 이 유물이 이곳의 중심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해 보였다. 나에게 이 태양의 돌은 이해해야 할 대상이라기보다, 멕시코라는 나라의 심장과 영혼이 응축된 상징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이 전시관은 방문객에게 설명을 요구하기보다, 이 나라가 스스로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자리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마야관에 들어섰다. 여기서는 최초의 문자가 등장했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하게 느껴졌다. 다른 고대문자들은 한두 번 어딘가에서 마주친 적이 있어서 익숙한데, 마야 문자는 의외로 아기자기했다. 각진 돌 위에 새겨져 있으면서도 형태는 요즘 일러스트처럼 귀엽고 리듬감이 있어, 오래된 문명이라는 거리감이 조금은 줄어드는 느낌이었다. 이 박물관은 전시실마다 실내와 실외를 오가는 구성이 인상적이었는데, 마야 야외 전시는 또 다른 기억으로 남았다. 키가 크고 잎이 무성한 나무들 사이로 신전이 우뚝 서 있는 모습은, 열대 특유의 습기와 함께 미스터리하고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만들어냈다. 진위 여부를 벗어나 실제 유적을 크고 완벽하게 재현한 전시 방식은 문명의 실제감을 느끼기 좋았다. 서있는 것만으로도 한때 정글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었다는 감각은 충분히 전해졌다.
점심을 먹으러 차풀페텍 공원(Chapultepec Park)에 있는 카페 겸 식당에 들어섰다. 이곳은 멕시코시티 시민들이 대표적 휴식처로 녹지와 호수로 이루어진 면적 7.3㎢의 공원으로 레포르마 대로 남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푸른 녹지와 동물원, 박물관 등의 볼거리가 자리하여, 시민들은 물론 여행자들에게도 인기 있는 곳이다. 간단한 간식거리를 파는 카페 겸 식당 뒤로 호수가 보이고, 주변에는 멕시코 젊은이들이 데이트를 하고 미국인 관광객들이 거리를 걷는 모습이 보였다. 공원은 크고 웅장한 나무들로 빽빽해서 자라온 시간을 말해줬다. 우리나라 조경과는 다른 멕시코의 초목들로 상쾌한 공기가 느껴졌다. 걷는 길도 쾌적하고 공기도 맑으니 멕시코시티가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두 번째 목적지인 소우마야 미술관 (Museo Soumaya)을 향해 걸었다. 이쪽은 멕시코 시티의 서쪽 폴랑코 지역이다. 오늘 가는 박물관과 미술관이 이쪽에 모여있기 때문이다. 출근하고 가게 영업을 준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걷는 방향만 달라졌을 뿐인데 도시는 같은 도시가 맞나 싶을 정도로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동쪽을 향해 걸을 때는 건물과 거리가 허름하고 쓰레기와 노숙인들이 즐비했는데, 서쪽을 향해 걸으니 거리가 깨끗하고 여유롭고 각자의 일에 집중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점심시간이 되자 레스토랑의 노천 좌석에서 즐겁게 식사를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세련돼 보였다. 명품거리도 지났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쪽이 멕시코시티의 소문난 부촌이라고 한다. 센트로 지역과는 전혀 다른 도시의 새로운 얼굴을 보았다.
멕시코시티의 하늘 아래 독특한 기하학적 외관을 뽐내는 소우마야 미술관(Museo Soumaya)에 다다르자, 1만 6,000개의 알루미늄 타일로 덮인 압도적인 건축미가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았다. 이곳은 통신 재벌 카를로스 슬림이 사별한 아내 '소우마야 도미트'를 기리기 위해 세운 곳이며, '모두를 위한 예술'이라는 철학에 따라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는 점 또한 인상적이었다.
미술관 내부로 들어서자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가장 꼭대기 층인 6층으로 올라가 아래로 내려오며 관람을 시작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단연 오귀스트 로댕의 조각들이었다. 카를로스 슬림이 특히 애정하여 수집했다는 로댕의 작품 380여 점이 넓은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양의 방대하여 어디부터 봐야 할지 길을 잃을 정도였다. 청동 근육의 역동적인 움직임과 고뇌가 서린 표정이 기억에 남는다.
이어지는 전시실에서는 15세기부터 20세기를 아우르는 유럽 거장들의 향연이 펼쳐졌다. 클로드 모네를 필두로 한 인상주의 회화들은 빛에 따라 변화하는 찰나의 순간을 아름답게 담아내고 있었고, 경건하면서도 화려한 종교 회화들은 당시의 시대상과 예술적 깊이를 가감 없이 보여주었다. 개인의 소장품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 컬렉션이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부터 살바도르 달리까지, 시대를 초월한 거장들의 숨결을 6만 6,000여 점의 방대한 소장품을 통해 마주하며 멕시코에서 유럽 예술의 정수를 만끽한 특별한 시간이었다.
저녁으로 이틀 전에 갔던 타코집에 다시 방문했다. 식당 주인에게 번역 어플을 써서 "너무 맛있어서 다시 왔다"라고 하니 큰 웃음으로 기뻐하셨다. 메뉴도 저번과 비슷하게 시켰지만 우리 가족 3명 모두 다시 먹고 싶은 맛이었다. 난 특히 이 집의 살사소스가 매력적이고, 남편은 선인장 노빨 볶음이 맛있다고 한다. 오늘은 멕시코 국민맥주 모델로 라거도 주문했다. 매콤한 살사의 맛은 매력적이지만 너무 매워서 내 몸이 감당할 수 없었고 화장실을 여러 번 들락 거려야 했다.
여행을 마무리하며 짐을 정리하다 보니 이번 여정이 남긴 여운이 새삼 깊게 다가왔다. 단편적인 여행 책자 속에서 글로만 접했던 멕시코의 역사는 실제 마주한 모습과 사뭇 달랐다. 테오티우아칸, 아즈텍, 마야라는 단단하고 거대한 뿌리 위에 스페인 식민지 역사가 층층이 쌓여 만들어진 멕시코는,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자존심과 강인한 힘을 내뿜고 있었다.
사실 처음에는 아름다운 해변과 편리한 시설을 갖춘 칸쿤에 가보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컸다. 하지만 막상 멕시코 시티를 경험해 보니, 이곳은 알면 알수록 반전이 많고 내공이 깊은 도시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인류의 시원부터 고대 문명의 경이로움, 성모 발현, 거장들의 예술혼까지 한데 어우러진 이 도시에서의 시간은 칸쿤의 휴양과는 또 다른 차원의 풍요로움을 선사했다. 짐가방을 닫으며, 멕시코라는 나라가 가진 묵직한 힘을 가슴에 담고 이번 여행을 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