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졸려서 일찍 잠들었다. 시차 때문인지 다음 날 아침 6시에 눈이 떠졌다. 창밖은 아직 어둡고, 차도 사람도 없이 고요했다. 도시는 온통 눈으로 덮여 있었다. 피곤을 털고 숙소 앞의 유명한 베이글 가게로 아침거리를 사러 나갔다. 그러나 주변 가게들은 모두 문을 닫았고, 베이글 가게 역시 굳게 닫혀 있었다. 아쉽지만 아침은 포기하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날씨를 다시 확인하니 어제처럼 매서웠다. 옷을 더 껴입고 다시 밖으로 나섰다. 전날 늦게 도착해 보지 못했던 장 아이볼을 찾았다. 높이 9.1m의 거대한 안구 조형물은 울타리 안 정원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실제 인간의 눈을 그대로 확대한 듯 사실적이었다. 눈 덮인 도심 한가운데에서 그 눈과 마주하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조금 더 걸어 존 F케네디 메모리얼 플라자(John F. Kennedy Memorial Plaza)도 들렀다. 1970년에 세워진 이 기념 공간은 건축가 Philip Johnson이 설계했으며, 이곳 댈러스에서 암살된 존 F케네디 대통령(John F. Kennedy)를 기리고 있다. 눈 쌓인 광장은 더 쓸쓸해 보였다.
오늘 일정은 렌터카를 타고 포트워스에 가는 것이었다. 렌터카 사무소까지 걸어갔지만, 그곳 역시 닫혀 있었다. 날씨 때문에 일요일부터 휴업했고, 오늘 낮 12시에 연다는 안내문만 붙어 있었다. 어떤 연락도 받지 못한 터라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댈러스 중심가조차 사람과 차가 거의 없는 상황을 보니 이해가 되기도 했다. 결국 일정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텅 빈 눈길을 걷다 보니 영화 투모로우(The Day After Tomorrow)가 떠올랐다. 모든 것이 얼어붙은 도시의 마지막 생존자가 된 기분이었다. 남편은 “시카고가 딱 이런 느낌이야. 가본 적은 없지만.”이라며 분위기를 살리려 했다. 아무것도 먹지 못해 배는 고팠다. 문을 연 세븐일레븐을 발견하고 들어갔다. 안에는 노숙자인 듯한 사람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따뜻한 음식을 찾았지만, 종류가 많지는 않았다. 무난한 샌드위치, 타코, 치킨, 스무디를 샀다. 또 냉동식품이다. 계산을 도와주던 흑인 할아버지는 날씨 이야기를 건네며 우리가 한국의 북쪽인지 남쪽인지 물었다. 미국 남부 특유의 스몰토크였다.
남편이 근처 성당에 가보고 싶다고 해 과달루페 대성당(Cathedral Shrine of the Virgin of Guadalupe)에 들렀다. 생각보다 규모가 컸고, 잠시 기도할 수 있었다. 곧 미사가 시작되었는데, 우리 가족을 제외하면 신자는 단 두 명뿐이었다. 영어와 스페인어가 함께 쓰이고 있어 이 지역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다시 걸어서 렌터카 사무소에 갔다. 12시 20분이었지만 아무도 없었다. 아무래도 오늘 하루 종일 쉬는 듯했다. 어디에 갈 수도 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호텔로 돌아가 호텔 직원에게 전화기를 빌려서 렌터카 직원에게 전화를 했지만 자동응답뿐이었다. 결국 마트에 가기로 했다. 호텔 직원이 마트는 연다고 알려줬다. 한번 가보고 싶었던 "트레이더 조스"를 가기로 했다. 4킬로 정도를 걷기로 했다.
높은 빌딩 숲인 도심을 벋어나 순환도로를 넘어서 댈러스 교외 주거지역으로 걸었다. 해가 높이 뜨니 햇볕이 꽤 강해서 선글라스를 꼈다. 햇살 덕에 도로의 눈도 조금씩 녹는 것 같다. 하지만 인도는 눈이 통으로 얼음처럼 얼어버려서 손으로 눌러도 눌리지 않는다. 살짝 녹은 부분은 깨 봤는데 두께가 손가락 하나만큼 될 정도로 두껍다. 그리고 미끄러워서 아들은 세 번이나 넘어지고, 나랑 남편도 한 번씩 넘어졌다. 눈이 맨바닥을 덮으니 장점은 길과 화단이 하나로 보여서 넓어보이고 땅에 더러운 것들을 다 가려서 깨끗해 보인다는 점이다. 하지만 단점은 동물 대소변이나 커피 흘린 것 같은 자국들은 적나라하게 남는다.
교외에는 의외로 사람들이 보였고, 문 연 가게들도 있었다. 마트 안에도 사람이 많았다. 빵, 파스타, 물 매대는 텅 비어있었다. 하지만 채소와 고기는 많았다. 마트를 돌면서 천천히 구경도 하고 물건을 담았다. 트레이더 조스는 유기농 제품과 자체 상품로 꾸며진 특별한 마트였다. 평소에 자주 가던 미국 마트처럼 다양한 대기업 제품들로 상품별로 종류가 많지는 않았지만 이곳 만의 독특한 개성이 있었다. 남편은 우리나라 로컬푸드 온 것 같다고 했다. 물가도 우리나라 수준인 것 같았다. 계산을 하고 우버 택시를 불러서 숙소로 한 번에 돌아갔다.
저녁은 직접 요리했다. 등심과 안심 스테이크, 연어구이에 채소를 곁들였다. 연기가 자욱해 창문 대신 현관문을 잠깐씩 열어 환기했다. 냉동 샌드위치에서 벗어나 제대로 된 식사를 하니 마음이 조금 풀렸다.
살면서 한 번 올 텍사스인데, 정작 텍사스다운 풍경은 거의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우울하던 하루는 결국 식탁에서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