댈러스에서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그동안 나에게 여행이란 어디에 갔는지, 무엇을 먹었는지가 중요했다. 그런데 오늘은 풍경보다 사람이 더 또렷이 기억에 남는다. 날씨와 부족한 정보 때문에 여러 번 난감했지만, 따뜻한 사람들 덕분에 결국 괜찮은 하루가 되었다.
사실 예전에 미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 내게 남은 인상은 미국인들은 차갑고, 남에게 큰 관심이 없으며, 영어를 너무 빨리 말해 알아듣기 어렵고, 어딘가 거만하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내가 가지고 있던 미국인들에 대한 이미지였다. 그런데 오늘 텍사스에서 만난 사람들은 그 기억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시차 때문에 남편과 나, 아들까지 모두 새벽 6시에 눈을 떴다. 남편은 달걀을 삶고 치즈를 빵 위에 올려 구워 아침을 차려주었다. 내일 체크아웃을 해야 하기에 음식을 남기지 않으려고 일부러 넉넉히 먹었다. 오늘은 렌터카 사무실이 열기를 바라며 다시 길을 나섰다. 여러 번 오갔더니 이제는 가는 길도 익숙하다. 어제와 달리 가게들도 많이 열었고 거리에도 차와 사람이 늘어난 듯해 희망이 생겼다. 하지만 도착해 보니 오늘도 사무실은 굳게 잠겨 있었다. 망연자실한 마음이 들었다.
그때 문득 공항에서는 빌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어제처럼 기다릴 수는 없었다. 공항으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역으로 향했다. 댈러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올 때 30분 넘게 떨며 기다리다 포기했던 DART 오렌지 라인이었다. 오늘도 단축 운행 중이었지만 다행히 30분 만에 기차가 도착했고, 우리는 무사히 공항에 도착했다.
시간을 지체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구글 지도에 나온 Hertz 렌터카 사무소를 향해 무작정 걸었다. 약 2km를 걷는 동안 길이 너무 외진것 같아서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참고 걸어갔다. 인도도 없는 눈길을 지나 도착한 곳은 소규모 비행기 운항 사무실이었다. 구글 지도가 잘못 안내한 것이다.
직원은 이곳이 아니라 공항 남쪽 렌터카 센터로 가야 한다며 우버를 부르라고 했다. 억울함과 분노가 동시에 올라왔다. 아무 공지도 없이 문을 닫은 렌터카 사무소, 잘못된 지도 정보로 한시간이나 인도도 없는 눈길을 걸어 왔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눈 때문에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렌트카 사무실도 열지 않아서 여기까지 와야 했다고 그 사람은 상관도 없는 내 이야기를 했다. 그때 직원 한 명이 우리의 사정을 듣고 렌터카 사무실까지 태워다 주겠다고 했다. 날씨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 것이 유감이라며 기꺼이 도와주었다. 렌터카 센터는 공항 남쪽에 꽤 떨어진 곳에 있었다. 급한 마음에 판단을 서둘렀던 내 실수가 아쉬웠다. 태워다 준 직원에게 감사 인사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가족들은 “당신이 우리를 구했어요.”라고 말했다.
렌터카 센터에는 여러 업체와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었다. 우리가 예약했던 허츠로 갔지만, 직원은 단 한 명뿐이었고 손님은 몰려 있었다. 기존 예약을 우리가 직접 전화로 취소해야 새로 차를 빌려줄 수 있다고 했다. 전화도 받지 않고 사무실도 열지 않았으면서 그런 요구를 하다니 황당했다. 말이 통하지 않자 결국 우리는 다른 업체에서 차를 빌렸다. 빌리는 과정은 비교적 순조로웠지만 차를 인수하는 데 또 문제가 생겼다. 한 번은 다른 사람이 차를 가져가고 있었고, 또 한 번은 준비된 차량이 없었다. 세 번이나 데스크를 오가며 겨우 차를 받았다. 아침 8시에 숙소를 나왔는데, 출발한 시간은 낮 12시였다.
모두 기가 빠진 상태에서 이제 320km 떨어진 오스틴으로 가야 했다. 가능할지 복잡한 마음이 들었지만 남편은 네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입력하고 차를 출발시켰다. 미국, 일본, 호주에서 여러 번 운전해 본 남편은 외국에서의 운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경부고속도로 달리는 것 같아.”라며 웃었다. 어제 못 간 오스틴을 오늘은 꼭 가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운전대를 잡은 듯했다.
먼저 들른 곳은 텍사스에만 있는 초대형 주유소 체인 버키스(Buc-ee's)였다. 100개가 넘는 주유기와 대형 편의점, 깨끗한 화장실로 유명한 곳이다. 귀여운 비버 캐릭터를 따라 진입하니 끝없이 이어진 주유기와 거대한 건물이 나타났다. 화장실은 소문대로 넓고 깨끗했다. 브리스킷 버거, 감자칩, 견과류, 슬러시를 고르고 셀프로 주유를 했다. 놀이공원에 온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많지 않아 곧바로 다시 오스틴으로 향했다.
긴 운전 끝에 도심의 빌딩이 보였고, 우리는 오스틴에 도착했다. 가장 먼저 간 곳은 테리 블랙스 바베큐(Terry Black's Barbecue)였다. 락하트 전통을 잇는 텍사스 바비큐 명가로, 오크나무로 훈연한 브리스킷과 비프 립, 소시지가 유명하다. 유튜브로 미리 보고 와서 기대가 컸다. 브리스킷과 비프 립을 각각 1파운드씩, 소시지 하나를 주문했다. 사이드로 코울슬로와 브레드푸딩을 곁들였다. 브리스킷은 믿기 어려울 만큼 부드럽고 육즙이 풍부했다. 비프 립은 익숙한 갈비 맛이지만 훨씬 더 부드러웠다. 소시지는 겉이 뽀득했고, 번트 엔즈는 양념이 진해 조금 짰다. 나무 인테리어와 카우보이 소품, 컨트리 음악이 어우러져 텍사스다운 분위기가 물씬 느껴졌다.
피트에서 고기를 굽고 있던 Matt라는 피트 마스터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유튜브에서 봤다고 하자 반가워하며 고기 굽는 과정과 오크나무 사용법, 계절에 따른 작업 방식까지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사진도 찍고 눈 내린 댈러스 이야기도 나눴다. 주차장으로 향했는데, 잠시 후 Matt가 우리 차로 달려왔다. 그리고 가게 기념 모자를 선물로 건네주었다. 어떤 색을 좋아할지 몰라 검정, 파랑 2개를 다 준다고 했다. 음식도, 분위기도 좋았는데 이런 배려까지 받으니 마음이 깊이 따뜻해졌다. 남편은 감사의 리뷰를 남겼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텍사스 캐피톨(Texas State Capitol)이었다. 1888년에 완공된 이 건물에는 텍사스 주의회와 주지사 사무실이 있다. 모든 것이 크다는 텍사스답게 규모와 위용이 상당했다. 더 둘러보고 싶었지만 시간 관계상 다시 댈러스로 향해야 했다. 오스틴은 며칠 전 눈이 왔다지만 이미 흔적도 없이 녹아 있었다.
돌아가는 길, 해가 서서히 기울었다. 큰 산이 없어 지평선 너머까지 시야가 트여 있었다. 색이 변해가는 대륙의 일몰을 뒤로하고 우리는 북쪽으로 달렸다. 가는 길에 다시 버키스에 들러 화장실을 이용하고 주유를 했다.
이번에는 내가 처음으로 주유를 했다. 그런데 노즐이 주유구에 걸린 채 빠지면서 가솔린이 튀어 나왔다. 머리와 얼굴, 손에 기름이 튀었다. 냄새는 강하고 매캐했다. 차 안에도 냄새가 가득했다. 당황스러웠지만 덕분에 졸음은 확실히 달아났다.
마지막까지 사건이 끊이지 않는 하루였다. 야경으로 빛나는 댈러스 시내에 다시 들어섰다. 중심부에는 여전히 눈이 쌓여 있었다. 숙소에 도착해 처음으로 렌터카를 주차했다. 차에서 내리는 순간, 그제야 긴장이 풀렸다. 서로를 바라보며 자연스럽게 한마디가 나왔다. “수고했다.” 정말 그런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