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프타운을 천천히 여행하면서,
나는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졌다.
요하네스버그에서 태어나 케이프타운에서 사업을 하는 한 젊은 친구는 케이프타운 사람들의 문화를 'laid-back approach to life'라고 정의했다. 느긋하고 여유롭고 큰 걱정 없이 낙관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태도라고 말했다.
해변가에 화려한 주택을 짓고 사는 슈퍼리치거나
영국, 독일 등지에서 건너온 은퇴자들만이 아니라
다 쓰러져 가는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가난한 마을 사람들도 행복지수가 높다고 했다.
그 친구는 남아공 이민 6세대쯤 되는 독일계 백인이라 나는 그 말을 모두 믿지는 않았다.
아름다운 산과 바다가 지척에 있고, 녹지가 풍부하고, 물가가 저렴하고, 영어가 잘 통하고...
생각해보니 케이프타운의 이 모든 장점들이
내가 백인 문화의 일부를 여행객으로서 누리고 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케이프타운을 여행하면서 에어비앤비로 집을 빌리고, 근교 와이너리 투어를 가고, 바닷가 산책로에서 아침마다 조깅을 하고, 동네 식당에서 밥을 먹고, 마트에서 장을 보는 모든 일상에서 나는 주로 백인들을 마주친다. 이들도 대부분 여행객이 아니라 남아공 사람들이긴 하다.
하지만 애초에 이 땅의 주인이었던 사람들과 만나고 교류할 기회는 생각보다 적다. 그 사람들의 문화, 역사, 가치관, 삶을 대하는 태도 같은 게 궁금한데 접할 기회가 거의 없다. 이들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은 케이프타운 외곽이거나 시내에서 가까워도 '우범지대'로 분류돼 한낮에도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곳이다. 얼마전 일본인 여행객이 노상에서 강도를 당했다는 뉴스를 들어서 더 조심스럽다.
비영리단체에서 실제 주민이 가이드를 해주는 타운쉽 투어 프로그램을 에어비앤비 트립으로 운영하는 것 같기도 하던데, 그걸 참여하는 것도 좀 망설여진다. 남에겐 진지한 삶의 터전을 마치 관람하듯이 돈을 주고 가서 슬쩍 구경하고 나오는 기분이 들어서 그렇다.
이곳에 한 달간 머물면서 내가 몰랐던 남아공의 자연과 문화를 조금 깊숙이 알 수 있길 바랬는데.. 널려 있는 상업적인 투어들과 문화시설을 열심히 살펴봐도 실제 그럴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을 것 같아 좀 안타깝다.
케이프타운에 머무르면서 돈은 정말 많이 쓴다. 일례로 마지막 주에 5일간 요하네스버그를 갔다가 크루거 국립공원 사파리 투어를 한 후에 케이프타운으로 다시 돌아올 예정인데 왕복 비행기에 사파리 투어만 해도 둘이서 200만원이 넘는 돈이 든다.
'소유'가 아니라 '경험'에 투자하자는 게 내 원칙이라 쓰는 돈이 가치가 있다면 아깝진 않은데, 돈과 시간과 에너지를 할애하는 것 만큼 내가 원했던 남아공, 케이프타운의 진짜 모습을 느끼고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나마 한 가지 다행인 건, 케이프타운은 내 스스로와 내가 가진 환경, 조건에 대해 객관적으로 생각해보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도시라는 점이다. 나를 뭔가 생각하게 만드는 도시라는 점은 마음에 든다ㅎ
여행은 왜 하는걸까, 오늘 이런 고민을 하면서 묘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