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예전 KBS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 3일'이란 프로그램이 있었다. 다양한 지역을 선정하여 3일, 72시간 동안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영상을 찍고 편집하여 방송을 하는 형식이었다. 특정 지역이나 특정 사람들에 대해 깊게 파악할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자주 보던 기억이 있다.
가을이 깊어가는 10월의 어느 날 근속 20주년, 취업 성공 등의 약속이 하나둘씩 잡히기 시작하는데, 10월 말에는 3일 연속 중요한 약속이 겹치게 되었다. 3일 동안 숙취해소도 하지 못하고 또다시 술자리가 생기면서 마치 72시간 동안 숙취 속에서 지낸 느낌이 들었다. 다큐멘터리 3일이란 프로그램 제목에 영감을 받아 '음주멘터리 3일'로 명명할 만큼 치열한 술자리가 있어 이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한다.
목요일 24시간: 20주년 근속 기념 축하
10월은 내가 근무하는 학교의 개교기념일이 있는 있는 시기이다. 십수 년 전만 하더라도 10, 20, 30 주년 근속자에게는 축하와 함께 회식도 하고 다양한 선물도 주곤 했지만, 지금은 근속을 기념할 만한 상패 하나가 전부이다. 대학동기처럼 직장 내 같은 나이 친구들이 자그만 계를 하고 있어서 20주년 근속의 해를 맞이한 친구의 축하 술자리를 갖게 되었다. 한 때는 돈을 모아 해외여행도 가고 열정적인 친구들도 이제 나이가 먹었는지 체력이 안되는지 아니면 더욱 가정적으로 변했는지 장시간 여행을 기피하여 가끔 만나 술을 마시면서 얘기를 하는 편인데, 이런 근속축하는 빠질 수 없는 술자리 만들기의 좋은 주제로 작동한다. 술자리 장소는 근속 친구가 1, 2차까지 정해둔 터러 퇴근과 동시에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국내산 육우를 파는 가게인데, 인기가 많아 오픈 후 금방 만석이 되고 웨이팅이 생기는 집이다.
빈속을 달래기 위해 각자 술을 시켰고, 나의 최애 주종인 막걸리를 팔지 않아 나는 소맥으로 정했다. 5명이서 소맥 마시는 놈, 맥주 마시는 놈, 소주 마시는 놈으로 나눠 마블링이 잘 된 소고기에 오랜만에 정답게 대화를 나눴다. 대화는 역시 누굴 씹는 게 맛이라고 학교에서 빌런 같은 사람들을 씹으며 고기를 씹으니 그 맛이 한 층 더 풍부해졌다. 1차에서 400g 소고기를 5판 먹고 취기가 오른 상태에서 길 건너 술집으로 2차를 이동했다. 친구 녀석이 전에 꽂혀 전을 먹고 싶었는데 결국 먹지 못하고 꼬막 무침과 찌개를 시켜 술잔을 기울였다. 나는 홀로 막걸리를 시켜 2병을 마셨다. 3차는 결국 전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2블록 떨어진 곳에 웨이팅을 해야 갈 수 있는 전집이 있었는데 이름도 잘 지었다. '산전수전'. 걸어가기 귀찮은 둘은 택시를 나머지 3명은 걸어서 이동했다. 전집에 맞게 나는 막걸리 친구들은 소주와 맥주를 마시며 술자리를 이어갔다. 5시에 만나 술을 마시니 술자리가 길어져도 아직 10시가 되지 않았다. 3차를 마치고 4차는 참치집으로 이동했다. 5명 중 2명은 집으로 돌아가고 3명이 남아 20주년 근속을 다시 축하하고 자리를 마무리했다.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면서 근속인 친구랑 얘기를 많이 했지만, 기억은 나지 않는다. 평일 술자리라 내일 또 일찍 일어나야 하는 부담감이 있었지만, 자주 있는 일이라 잘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금요일 48시간: 7급 군무원 합격 축하
예전에 같이 근무를 하다가 일을 그만두고 과외를 하는 친구가 있다. 나이는 나보다 10살 어리지만 나는 나이에 따라 위아래 나누는 것을 싫어해서 그냥 친구처럼 지낸다. 과외를 하면서 군무원 시험을 준비하면서 1년 만에 1차에 합격했지만, 아쉽게 2차에서 고배를 마신 작년부터 칼을 갈아 올 해는 당당히 최종까지 합격을 했다. 이를 축하하기 위해 나와 친구, 그리고 나와 친구에게 배운 제자 한 명이 합류하여 11월의 첫날 모임을 갖게 되었다. 장소는 어제 소고기를 먹어 오늘은 돼지고기로 잡았다. 아이들 밥을 차려주고 걸어서 약속장소로 이동했다. 아직 어제의 술자리 여파가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다. 시간에 맞춰 도착하니 친구 녀석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제자가 좀 늦게 도착하자마자 고기는 구워지고 술잔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다행히 나의 최애 주종인 막걸리가 있어 나는 막걸리로 정하고 친구는 소주, 제자는 소맥으로 군무원 합격을 축하했다. 늦었지만, 제자도 현대차에 취업한 것을 같이 축하했다. 나름 이곳에서 맛있는 집으로 소문이 나서 고기의 맛은 어제 소고기 못지않게 맛있었다. 서로 살아가는 얘기를 하며 처음 삼겹살에 이어 통항정살로 1차 술자리를 마무리했다.
2차는 친구 녀석이 가끔 가는 bar를 가기로 했다. 개인적으로 그 돈 주고 양주를 마시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크지만, 솔로인 친구 녀석은 씀씀이가 크다. 1차에서 소주 한 병도 안 마신 놈이 2차에서 본인이 산다고 양주를 시키고 소주 마시듯 마시다 맛이 거의 갔다. 나도 덩달아 홀짝홀짝 마시긴 했지만, 어제의 알코올이 아직 남아있는지 취기가 올랐다. 바깥엔 비까지 내리니 분위기는 좋았다. 더 마시면 통제 불능이 될 듯하여 각자 택시를 태워 보내고 비 내리는 거리를 걸으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1차 막걸리, 2차 양주... 좋지 아니한가?
토요일 72시간: 동네 친구와 술 나들이
동네 친구와 주말에 한 잔씩 하는 편인데 요즘 바빠서 자주 보지 못했다. 가을 찬 바람도 불기 시작하니 따뜻한 조개구이를 먹으러 가기로 했다. 새로 생긴 조개구이집이 있다고 하여 발걸음을 옮겼다. 가을 정취를 느끼며 골목길을 빠져나와 가게 앞에 도착하니 오후 5시에 문을 연다고 되어 있었는데 시간이 지난 상황에도 가게 안 불은 켜지지 않았다. 이런 낭패가 있나? 빠른 판단으로 택시를 타고 인근 굴구이집으로 가려는 순간 자주 가던 횟집이 눈에 들어왔다. 예약을 하지 않으면 가기 힘든 가게라 들어가 보고 자리가 없으면 굴구이를 먹으러 가기로 하고 문을 열었다. 모든 테이블에 수저가 세팅된 것을 보고 안 되겠구나 하는 순간 서빙을 하시는 분이 앉으라고 하는 거였다. 예약이 취소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수저가 세팅된 자리로 우리를 안내했다. 동네 친구와 걸어오며 숙취해소제를 마셔서 인지 정신이 또렷해졌다. 인당 4만 원짜리 코스 회를 시키고 회에는 소주를 외치며 소주잔을 기울였다. 회를 2/3 쯤 먹었을 때, 작은 접시에 옮겨준다며 가져간 회에 전복과 ㅏ참치회를 추가해서 가져다주셔서 저녁도 먹지 않았지만,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다.
원래 3일 연속 술을 마시다 보면 초췌하니 몰골도 말이 아니고 술도 잘 안 넘어가는데, 앞선 이틀의 술자리가 축하의 자리라 즐겁게 술을 마셔서 인지 술이 덜 취하는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숙취해소제까지 마셨으니 원래라면 1차에서 끝낼 체력이었는데 2차로 이자카야에서 맥주를 한 잔 더 하기로 했다. 친구집 근처에 자주 가는 이자카야에서 꼬치구이를 시켜 맥주를 각각 3잔씩 더 마셨다. 오늘이 토요일이라는 것에 더욱 감사한 날이었다. 즐겁게 마시고 친구와 헤어져 집으로 향했다. 이렇게 나의 72시간 음주멘터리는 막을 내렸다.
내일 하루 쉬면 72시간의 숙취는 해소되겠지?
PS. 뭔가 빠진 내용
부제가 소중한 사람들인데, 소중한 사람에 대한 얘기는 하지 않았구나. 일단 술자리에서 만나는 사람이 소중한 사람이다. 같은 시간을 공유하면서 1급 발암물질인 술을 같이 마시는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가? 거기에 대화가 통하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간혹, 술을 마실 때 자기주장만 하고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 친구들이 있다. 살아보니 그런 친구들은 서서히 멀어지더라. 예전엔 그래도 친구잖아 하며 멀어짐을 늦추기 위해 약속도 잡고 했지만, 이제는 멀어지면 멀어지는 대로 놔둔다. 억지로 잡는다고 잡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이젠 알게 되었다. 가을이 더욱 짙어지는 11월이다. 모두들 소중한 사람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기 바란다. 그게 굳이 술이 아니라도 다양한 많은 것들이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