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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올하르방 Jan 03. 2024

붓으로 그려낸 여행, 스페인

현재의 스페인에서 과거를 보는 방법, 프롤로그


여행을 하다 보면 그 도시에서만 느낄 수 있는 공기가 있다. 그 공기의 형태는 향이 될 수도 아니면 색이 될 수도 있는데 그 장소가 나에게 묻힌 향과 색이 기억이 되고 그렇게 쌓여 그려지는 게 그 도시의 추억일 거다.

분명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시각을 통해서만 만들어진 기억에 대해서 회의적이다. 왠지 희미하게 그려진 스케치 같은 느낌이랄까? 그런데 향과 색으로 만들어진 장소의 기억은 희미하게 그려진 스케치 위에  유화 물감을 칠한 것처럼 덧칠할수록 기억은 더욱 진하게 남겨진다.


그런 나에게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의 첫 기억은 아무리 덧칠해도 변하지 않을 것만 같은 무향과 무채색으로 가득 채워진 장소였다. 그런 무채색의 도시에 살아가며 미술이라는 붓을 만나 서서히 채워나간 캔버스 같은 나의 기억을 글로 옮긴다.


마드리드를 떠올리면 플라멩코의 선율 위 집시들의 짙은 향과 투우사의 정열적인 붉은색이 제일 먼저 떠오르겠지만 이미 짙은 색을 가진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와 그라나다에서 살다 온 나에게 마드리드는 다른 도시들에 비해 너무 평범해 보였다. 다른 유럽의 수도, 로마나 파리만큼 깊은 역사의 나이테를 가진 것도 아니며 바르셀로나와 그라나다만큼 색이 뚜렷하지도 않은 그저 그런 도시였지만 나 역시 당시 여행가이드를 하며 알람시계처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소리만 내는 그저 그런 가이드였기에 지금 생각해 보면 나와 닮은 이 도시에 왠지 모를 끌림이 있었던 거 같다.



색으로 시대를 물들인 화가 'Henri Matisse 앙리 마티스'는 젊은 나이에 충수염을 앓게 되며 수술을 받게 되는데 회복 중에 어머니가 선물로 건넨  물감상자를 받게 되면서 그는 회색 같았던 20대 이전의 삶이 앞으로는 색으로 가득 채워질 것만 같은 경험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무채색의 도시에서 무향으로 살아가며 그저 그런 20대의 마지막 해를 보내고 있던 나에게도 마티스의 물감상자 같은 선물이 나타나게 되는데 그 선물은 바로 프라도 미술관이었으며 그렇게 선물 받은 붓을 가지고 나는 무채색의 도시에 추억이라는 채색을 하며 내 삶의 향을 만들기 시작했다.


미술은 자신의 지적 우월성을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도구쯤이라고 생각하던 어느 날 마드리드를 찾은 지인들의 성화에 못 이겨 프라도 미술관을 방문하게 되었다. 무료입장 시간에 입장하게 되어 시간이 많지 않아기에 각자 보고 싶은 작품을 보고 출구에서 다시 만나기로 했는데 넓은 미술관을 생각 없이 헤매다 나는 결국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스피커로 미술관 전체에 마감 안내방송이 흘러나오고 더욱 분주하게 출구를 찾던 내가 안쓰러웠는지 한 명의 직원이 말을 걸어왔다. 이후 에도 그 직원의 인상착의를 떠올려 보려고 했지만 사실 성별이 여성이었던 것만 기억나고 그 외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기억에 남는 건 "그렇게 급하게 나가지 않아도 돼요, 천천히 가요"라는 따뜻한 한 마디와 "이렇게 조용한 시간의 미술관은 보기 힘들어요, 한 번 가까이서 보고 가요" 라며 건네준 선물이었다.

Museo del Prado 프라도 미술관

'디에고 벨라스케스 Diego Velázquez'의 대표작 '시녀들 Las Meninas'. 내가 마주 했던 작품이다. 텅 빈 공간에 나 홀로 작품 앞에 서서 자세히 들여다보니 멀리서 바라보던 때의 완벽한 모습이 아닌 뭉개져 찍힌 물감자국과 붓이 지나간 여러 갈래의 지저분한 흔적들 같은 새로운 것들이 보인다.

벨라스케스가 마주하고 있던 캔버스 앞, 같은 거리에서 그림 바라보던 나는 어느샌가 그의 시간 속에 스며들며 시공간을 공유하는 존재가 된 것만 같은 느낌이다.

그들이 살았던 시간을 탐닉하는 존재가 나라고 생각했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니 그림 속의 그들도 내가 살아가는 시간이 궁금하다는 듯 우리를 바라본다.


"왜? 화가는 이렇게 붓질을 했을까?"

"왜? 이 자리에 서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을까?"


되돌아오는 답은 없지만 끝없는 질문을 던지다 보니 더욱 궁금해져만 간다. 여기 있는 수많은 그림들이 그들이 살았던 시대로의 초대장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품으며 나는 다시 나의 시간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그들의 초대를 마치고 미술관을 나와 바라본 도시는 여전히 무채색의 도시였지만 나는 이 도시를 채색할 붓을 선물 받았고 그렇게 도시를 나만의 기억의 색으로 캔버스를 채워가기 시작했다. 이게 내 마드리드 이야기의 시작이다.

Las Meninas 시녀들

사실 처음부터 마드리드는 무채색의 도시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 당시 삶의 살아가는 나의 태도가 색이 없었던 것뿐일 수도 있다. 현재도 상황은 여전히 그대로 불분명하게 삶을 살아가고 있고 영원히 바뀌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처음으로 미술을 접한 그 순간처럼 관심을 가지고 가까이서 보면 분명 또 다른 기억의 색을 가지고 삶이라는 캔버스를 채워 나갈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가지며 오늘도 새로운 색과 향을 내 삶에 입혀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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