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 다반치 공방 <모나리자>
거창함이 나를 지킨다고 생각했지만 어느 순간 거창함은 오히려 나를 초라하게 만드는 걸 느끼는 순간이 있다. 화려한 허상이 아닌 묵묵한 진실이 나를 더욱 선명하게 만들어주는 걸 알지만 그 진실의 초라함이 두려워 다시 뒤돌아 허상을 쫒는 수많은 순간들 속에서 나는 살아왔다.
그런데 거창함이 순전히 허상만은 아니더라. 허상을 쫒는 수많은 순간들 속에서 어느샌가 작지만 단단한 진실이 되는 순간도 많으니까.
나에게 미술이란 그런 거창함이었다. 수많은 전공자들을 스쳐가며 전공자가 아닌 나를 초라하고 작게 만들어 갔고 그 초라함이 두려워 더 많은 미술관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한 장소만 파도 모자란 시간에 허상을 쫒는다는 여러 목소리도 무시하며 누구의 영향도 받지 않은 순전한 나만의 취향과 감각만을 통해 발걸음이 이끌어준 곳으로 향한다. 그런 나에게 어느 날 위로의 미소를 건네준 한 여인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분명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미술작품을 하나 꼽으라고 한 다면 많은 사람들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린 <모나리자>라고 대답할 거다. 다 빈치는 죽을 때까지 이 그림을 완성하지 못했다며 아쉬워했지만 그 미완성의 여인은 현재 인류의 미소라고 불리며 500년이 지난 지금에도 끝없는 미스터리들을 양성하고 있다. "점 하나도 허투루 찍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다 빈치의 마스터피스가 따로 있음에도 매 년 루브르 박물관을 찾는 방문객의 20% 이상이 <모나리자>만 보고 박물관을 떠난다고 한다.
왜 우리는 모나리자에 열광하는 걸까?
루브르 박물관에 엄청난 인파가 몰리는 일요일, 모나리자 앞으로 할머니 분장을 한 남자가 휠체어를 이끌고 다가갔다. 이 남자는 작품 가까이 충분히 다가간 후 휠체어에서 뛰어내리며 가발을 벗어던지고, 작품이 담긴 방탄유리를 마구 두드렸다. 그리고는 케이크를 유리에 바른 후, 장미꽃을 사방으로 던졌는데 2022년 환경운동가였던 이 남자는 지구 기후환경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한 저항운동이라는 명목하에 <모나리자>를 테러했던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라 2009년에는 한 여성이 뜨거운 차가 담긴 찻잔을 작품에 던지기도 했고, 1956년에는 염산 테러와 돌을 맞는 일이 생기면서 그림 속 여인의 왼쪽 팔이 망가져버리게 되고 모나리자는 결국 유리 이불을 덮게 되었다. 그리고 모나리자를 가장 유명하게 만든 사건은 1911년 루브르에서 행방불명된 모나리자 도난 사건이다. 지금과는 다르게 그 당시 모나리자는 루브르의 수많은 컬렉션 중 하나 일 뿐이었기에 박물관 측은 24시간 동안 작품이 사라진 줄도 몰랐다고 한다.
후에 프랑스 정부는 박물관을 폐관하고 국경을 봉쇄하며 행방을 찾기 시작했고 프랑스의 신문사들도 대대적으로 기사를 내기 시작하며 사라진 그녀를 찾는 소식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 그리고 미국까지 흘러들어 가게 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도난사건은 <모나리자>의 엄청난 홍보효과를 가져오게 된다. 거기에 많은 용의자가 거론되던 중 파리에서 활동 중이던 젊은 화가 파블로 피카소의 이름까지 나오면서 ‘다 빈치가 그리고 피카소가 훔친’이라는 타이틀로 더욱 이슈가 되는데 피카소는 경찰조사를 받고 혐의 없음으로 금방 풀려나지만 가십거리로는 충분했다.
결국에 진범이 밝혀지며 모나리자는 1914년 파리 시민들의 품으로 다시 되돌아왔다, 스쳐 지나가는 그림이 아닌 인류의 미소로 말이다.
하지만 ‘도난’이라는 배경으로만 현재의 거창함을 가지는 건 불가능일 것이다. 이런 배경에 더해 회화로서 완벽함을 가진, 미완성의 불완전한 작품이기에 이 속에서 새로운 자극을 느끼며 우리는 이 작품을 더욱 찾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오늘 내 글의 주인공은 모나리자를 그린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아니라 천재로 이름 날리던 다빈치와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신비로운 또 하나의 미소를 그려 낸 다빈치의 제자가 바로 오늘의 주인공이다.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에는 또 하나의 모나리자가 존재한다. 처음 발견 당시, 배경은 전부 짙은 물감 속에 숨겨 있었기에 수많은 모나리자의 모작 중 하나라고 판단한 미술관 측은 가치 평가를 하지 않았지만 2011년과 12년 전문가들에 의한 연구와 복원을 걸치며 루브르의 모나리자와 같은 시기, 같은 장소에서 그려진 작품이라는 결과가 도출된다.
이후에 함께 탄생했지만 긴 시간 만남을 가지지 못했던 두 모나리자는 루브르 박물관에 나란히 전시되며 수 세기만에 재회한다. 두 여인의 만남은 다 빈치와 모나리자라는 자물쇠로 잠긴 비밀의 문을 열어줄 열쇠로 여러 연구가 진행되는데 그렇게 시작된 연구 중 프라도의 모나리자는 다 빈치의 제자였던 '프란체스코 멜치' 또는 '안드레아 살라이'의 작품이라는 추측들이 쏟아지게 된다.
스승과 제자의 붓을 통해 탄생한 두 여인의 미소가 결정적인 차이를 주는데 다 빈치가 그린 모나리자의 미소에는 '스푸마토 기법(연기와 같이)'으로 인해 미소의 의미가 불확실해 많은 감정을 떠올리게 한다면 제자의 작품이라 추정하는 모나리자의 미소는 확실한 행복의 미소가 보인다.
행복한 미소를 짓는 또 하나의 모나리자, 두 제자 중 누구의 손길로 그려진 작품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나는 다 빈치가 눈 감는 순간 품고 있던 자신의 모든 흔적들을 남겼다고 전해지는 '프란체스코 멜치'가 그 주인공이라고 생각한다.
밀라노의 귀족집안에서 태어난 프란체스코 멜치는 여러 교육을 받으며 소위 엘리트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어려서부터 예술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며 귀족가문의 일원으로 사회적, 정치적 책임을 떠맡게 되면서 자유로운 예술가로서의 꿈은 자신의 삶과 멀어져만 갔지만 다 빈치를 만나며 속박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자유라는 선물을 받게 된다. 프란체스코 멜치는 결국 스승만큼 위대한 예술가로서의 삶을 살아가지 못하지만 자신에게 자유로움을 건네주었던 다 빈치에 대한 인간적 감정의 감사함과 예술가로서의 존경을 가지며 다 빈치 작업실의 수습생이 된 순간부터 자신의 삶은 스승의 삶을 더욱 빛 내는 존재로서의 가치를 두고 평생을 바친다.
자신의 이야기를 극도로 남기길 꺼려했던 다 빈치였기에 현재도 그의 많은 이야기는 과거, 그의 시간 속에 숨겨져 있지만 프란체스코 멜치가 보존한 그의 흔적들과 미래 세대를 위해 그가 남긴 흔적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라는 인류의 보석 같은 존재를 기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화가로서의 충만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스승이 남긴 모든 기록의 문학적 집행자로 살아가며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메모와 스케치를 엄선하여 편집한 <코덱스 우르비나스 : 회화론>을 만든다.
간혹 프란체스코 멜치가 다 빈치의 흔적들을 수집하고 편집하는 과정 중 유실된 자료들이 많다는 이야기나, 또는 생활고에 일부 자료들을 판매했다는 말도 있지만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과정 중 편집된 내용일 뿐이며 지금까지 모든 자료들이 남아 있다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연구에 큰 공헌을 했을 거다라는 말은 진부한 결과론적인 의견이지 않나 싶다.
두 모나리자는 분명 스승과 제자의 회화적인 완숙함의 차이가 느껴지며 그녀의 미소에는 그리는 주체들의 다른 감정이 확연하게 느껴진다.
다 빈치가 그린 모나리자 속 신비로운 미소의 의미에 대해 정신분석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혼외자로 태어나 다섯 살에 어머니와 헤어진 다 빈치의 모성에 대한 그리움으로 해석했다.
모나리자의 미소는 어린 시절 헤어진 어머니의 미소가 되어 다 빈치 자신을 향해 웃는 모습으로 그리움을 표현한 감정의 표현이라면 프란체스코 멜치가 그려낸 미소는 속박된 자신의 삶에 자유를 선물한 스승의 그림자를 따라가는 그 순간의 내면 속 행복이 자신에게 미소 짓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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