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 프라 안젤리코 <수태고지>
마드리드에서 투어를 마친 후 함께 하루를 보낸 분이 마지막 인사로 건네준 한 마디가 있었다.
"언젠가 일상이 지치고 힘든 순간, 오늘의 시간을 기억하며 이곳에 있을 당신을 위해 꼭 기도하겠다"
삶이라는 한 권에 담긴 여러 가지 시련의 페이지속에 우리는 살아간다. 하지만 또 다른 페이지에는 나를 따뜻하게 안아 줄 위로와 이해의 이야기도 분명 존재하길 바라며 우리는 매일 기대어 기도한다. 그런데 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해 주며 그 페이지를 대신 채워준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나를 위한 나의 기도라는 단순한 행위를 순간마다 반복하며 살아가는 나에게 당신을 위해 기도하겠다는 한 마디는 내 삶 속에 힘든 순간, 그리고 감사한순간, 누군가 날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안도감을 주며 더욱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 준다.
'지금 당신들과 내가 함께 경험하는 이 순간의 기억들이 언젠가 의지가 흔들리는 순간을 붙잡아 주는 구심점의 역할로 작용하게 해 주세요' 라며 나는 매일 누군가를 위한 기도를 한다. 누군가 나를 위해 소망해 준 기도에 담긴 위안을 또 다른 누군가가 느끼길 바라며.
그래서 오늘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려진 그림,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 1387~1455)의 수태고지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한 송이 꽃 같은 도시 피렌체, 골목길 구석까지 르네상스의 신선한 산들바람이 불어오던 1430년 경, <수태고지>는 프라 안젤리코라 불리는 수도사의 손에 의해 탄생한다.
이탈리아어로 '수도사'를 프라(Fra)라 칭하며, 안젤리코(Angelico)는 '천사의'를 의미한다. 따라서 프라 안젤리코는 '천사 같은 수도사'를 의미하며, 이 이름은 마치 천사와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삶을 살아온 그를 향한 경의의 표현으로 남아 현재에도 본명인 '귀도 디 피에트로'보다는 '천사'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도미니크 수도회의 수도 원장까지 역임하며 평생 신을 위한 삶을 살아가는 동시에 종교화가로 활동하며 예술작품을 통해 보는 이의 신앙심을 이끌어내는데 탁월했던 그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그가 왜 천사 같은 수도사라고 불리는지 수긍이 될 정도로 따뜻함을 담아 전하는 누군가를 위한 기도 같다는 느낌이 든다.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루카 1장 30~31절)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구원자의 잉태를 예고하는 신약 성서의 일부분이다. 신의 아들인 예수가 인간으로서의 삶을 얻게 되는 첫걸음이자, 구원자를 탄생케 한 여성으로서의 마리아를 예고하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 순간을 <수태고지>라 부른다. 화가들은 기독교의 근간을 이루는 이 사건을 중요한 주제로 삼으며 종교의 테두리 안에서 순종적인 마음으로 표현하기 시작한다. 긴 겨울의 한숨에서 깨어난 한송이 봄처럼 신이 아닌 나라는 존재에 대한 탐닉을 갈구하던 르네상스 시대가 피어나며 시각적으로 보이지 않는 믿음의 세상에서 실제 하는 존재의 세상으로 나아가는 순간을 축복하듯 화가들은 영적인 존재에서 물질적인 존재의 삶을 얻은 예수의 첫 순간을 더욱더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인간은 영적인 세상과, 육체적인 세상으로 구분되어 있음을 인식하지만 그 시대의 화가들이 수태고지를 통해 담아내고자 했던 메시지는 영적인 세상과 육체적인 세상의 단절이 아닌 영적인 존재에서 물질적인 삶으로서의 이동을 통해 두 세계는 동시에 하나라는 연결고리를 보여주고자 했던 게 아닌가 싶다.
수태고지 속 마리아의 모습은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 5가지의 상태로 표현된다. 뜻밖의 천사와의 만남을 통한 놀라움과 경이로움에 당혹감을 가지는 마리아의 모습을 시작으로 천사의 말을 듣고 그가 건넨 말의 의미를 숙고하며 그 무게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모습, 그다음 일상의 법칙을 뛰어넘는 신비한 상황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한 깊은 궁금증을 가지며 천사에서 다시금 질문하는 장면, 그리고 무한한 지혜를 지닌 신의 계획에 순응하며 자신의 존재를 신에게 드리는 순종의 모습과 마지막으로 예수를 잉태하는 공로의 상태로 표현되는데 안젤리코는 겸손한 모습으로 두 팔을 가슴에 모아 신의 뜻을 믿고 순종하며 고개 숙이는 마리아를 표현하고 있으며 순종하지만 처녀의 몸으로 잉태할 것이라는 당혹스러울 소식에 놀란 마리아를 진심 어린 따뜻함으로 바라보는 천사 가브리엘의 모습까지 함께 볼 수 있다.
안젤리코 이전 수태고지에서 가브리엘 천사는 근엄한 무표정의 형태로 전달이라는 목적만을 두고 마리아에게 신의 뜻을 통보하는 강압적인 존재로 표현되는데 비해 안젤리코의 수태고지 속 천사의 모습은 진심으로 마리아를 배려하는 한없이 부드러운 표정과 살짝 무릎을 굽힌 겸손한 존재로 마리아 곁에 머물고 있다. 거기에 더 해 천사의 복장이 실제 자신이 활동했던 피렌체 수도원의 수도사들이 착용했던 수도복인걸 보면 안젤리코는 천사가 취하는 행동들이 바로 신을 믿는 이들이 가져야 할 타인을 위한 따뜻한 배려와 겸손, 그리고 태도라는 걸 그림 앞에선 모든 이들이 느끼길 바라며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까 싶다.
안젤리코의 수태고지는 크게 제단화와 벽화로 나누어지는데 프라도 미술관의 수태고지에서는 제단화로서의 기능에 충실한 면모가 보인다. 제단화의 중요한 기능은 과거 글을 모르는 일반 신도들을 위한 성서 교육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데 1426년경(추정) 피렌체 근처 피에솔레 Fiesole의 도메니크 수도원의 제단 장식화로 그려지지만, 1611년 스페인으로 건너오게 되면서 현재는 프라도 미술관에 전시되며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특히 피렌체의 산 마르코 수도원에 벽화로 그려진 안젤리코의 수태고지와 비교해 보면 서로 기능적인 차이점이 우리에게 뚜렷하게 보인다. 우선 수도원의 벽화로 그려진 수태고지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종교화에서 항상 나타나는 도상학이 전혀 보이지 않는 부분이다. 마리아의 순결과 경건함을 상징하는 흰 백합이나 무릎 위의 성경, 또는 성령의 비둘기와 같은 모든 도상들을 생략하고 꾸밈없이 단순함만을 남기는데 이는 이 벽화를 감상하는 주요 대상이 일반 신도가 아닌 벽화 속 사건을 충분히 숙지하며 살아가는 수도사들이었기에 교육의 목적보다는 하루에도 몇 번씩 벽화를 마주치며 이 주제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기고 스스로 자기 성찰과 반성을 하는데에 초점을 맞춰 그린 그림으로 보인다.
반면 프라도 미술관에 전시 중인 수태고지는 교회 제단화로 제작되었기에 교육적인 기능을 위해 앞서 말한 내용들이 꼼꼼하게 표현되어 있다.
우선 이 작품은 가로로 3등분 나눠진 구도로 그려지는데, 왼쪽 3분의 1과, 오른쪽 3분의 2는 서로 각자 다른 시공간으로 표현되어 오른쪽은 가브리엘과 마리아의 이야기, 그리고 왼쪽은 선악과를 먹고 죄를 짓게 되면서 가브리엘에 의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 구성된다. 성경 속 인류의 저주와 구원이라는 구약과 신약의 대표적인 두 이야기를 배치하며 인간의 조상이 저지른 원죄를 마리아를 통해 이 땅에 오실 신의 자녀인 예수로 인해 다시금 용서받게 된다는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를 보여주고 있는데 안젤리코는 다른 화가들과는 다르게 아담과 이브가 낙원에서 추방되는 장면을 강압적인 모습이 아닌 안타까운 표정의 천사가 그들을 안내하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한 걸 보며 참 따뜻하고 배려심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담과 이브의 위로 그림을 가로지르며 마리아를 향해 내리쬐는 찬란한 빛줄기와 그 속에 자리 잡은 하얀 비둘기를 볼 수 있는데 “말씀이 곧 빛이었다.”는 요한 복음서의 구절을 인용했다. 미술사에서 신의 말씀 곧 성령은 눈에 보이지 않기에 처음에는 빛줄기의 형태로만 표현되다 서서히 비둘기라는 뚜렷한 형태와 빛을 함께 표현하게 된다. 안젤리코도 역시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하는 순간을 빛줄기와 비둘기를 함께 사용하며 아름다운 순간을 표현했다.
마리아는 천사를 만나기 전 성경의 이사야서 7:14절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이를 낳을 것이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라"는 구절을 읽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를 뒷받침하듯 마리아의 무릎에는 펼쳐진 성경책과 마리아와 가브리엘 사이의 기둥에서는 이사야 선지자의 부조까지 보인다. 이 역시 글을 모르는 신도들을 위한 교육의 기능을 목적으로 둔 작품으로서 꼼꼼히 표현된 부분들이다.
안젤리코의 수태고지는 동시대에 한창 유행하던 원근법과 비례론을 다른 화가들만큼 표현하지 못했다는 의견도 많다. 가브리엘과 마리아의 체구만 봐도 너무 크게 그려진 모습이기에 건축물의 크기와 전혀 맞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하늘의 천사와 마리아의 아름다운 만남을 통해 종교적 감수성과 미적 아름다움을 조화롭게 표현하며 드디어 예술의 힘을 통해 인간 내면의 감성을 이끌어 내게 되었다는데 더욱 큰 의미가 있어 보인다.
이 작품은 미술관 속 작은 사색의 공간에서 나의 마음을 다독여주며, 예술을 통해 따뜻한 기도를 받은 듯한 특별한 순간을 선물해 주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작품 앞에 서면 항상 '삶이 지치고 힘든 순간 모든 이들이 이 작품 앞에서 현실과 초월적인 세계가 하나 됨을 경험하며 삶에 의지를 굳건하게 만들어주세요'라는 당신에게 전하는 안젤리코의 기도가 들려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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