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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gantes Yang Nov 27. 2022

내 뱃속에는 블랙홀이 있었다

끊임없이 들어가는 음식

내 뱃속에는 블랙홀이 있었다


물론 이제는 옛날 얘기다.

무슨 말일까 싶을 것이다.


말 그대로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고

살이 찌지 않던 때가 있었다는 소리다.


형과 나는 굉장한 우량아로 태어났다고 한다. 다만 형과는 달리 나는 식욕이 엄청났고 편식이라는 걸 거의 해본 적이 없이 자랐다. 뭘 먹여도 다 잘 먹었다고 한다.


참고로 형은 어려서부터 편식이 심했다고는 하지만 지금의 형은 나보다 덩치가 좋다. 하지만 편식과는 상관없이 어려서부터 우리 형제는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취식 물에 대해서 자주 다퉜다.


초등학교 때만 해도 어머니께서는 형제들을 위해 500ml 우유를 매일 배달시키셨다. 어린아이들이 마셔봤자 얼마나 마시겠나 하겠지만 형이 한두 번 꿀꺽, 동생이 한두 번 꿀꺽하면 끝나버리는 양이었다. 매일 아침 어머니께서는 나도 좀 마시자! 하셨지만, 소용없다는 걸 아셨는지 그다음 달부터는 1,000ml짜리 우유 하나를 매일 주문하셨고, 그다음 달에는 1,000ml짜리 우유 두 개가 현관문 앞에 놓이게 되었다. 양과는 상관없이 하나였던 양이 두 개로 늘었으니 형제는 각자 하나씩 마시게 되었다. 어머니께서도 포기하셨는지 당신의 몫은 슈퍼에서 따로 사드셨다.


어머니께서는 내가 짐승을 키우는지, 사람을 키우는지 모르겠다 고 하셨다.


아버지의 직장 때문에 우리 가족은 초등학교 때 미국으로 건너가 3년 정도 살게 되었다. 거기서 난생처음으로 맛본 피자맛은 잊을 수가 없다.


아직도 즐겨 먹는 슈퍼딜럭스 피자.


지금의 L(라지) 사이즈가 당시에는 S(스몰)과 M(미디엄) 중간이었던 당시에 초등학교 3학년에 막 진학한 나는 L(라지: 지금의 페미리 사이즈 정도 이상)를 혼자 다 먹어 치웠다.


중고등학교 시절 형제의 식욕은 더욱더 왕성해졌다.


중학교에 진학한 형제는 키가 급속도로 자라기 시작했고,

먹는 양도, 활동양도 어마 무시하게 늘었다. 지금은 흔한 키가 되어버렸지만 내가 고1, 형이 고3이 되던 해에는 둘 다 185센티가 넘었다. 지금은 둘 다 189센티에서 멈춘 듯 하지만.


형 하고는 같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나왔다.


쉬는 시간 매점으로 가면 학생들로 붐비는 틈 사이에 언제나 군만두로 양쪽 볼 가득했던 형이 늘 있었다. 1교시 끝나고 가나, 5교시 끝나고 가나 상관없이 형은 늘 있었다. 동생 먹을 것 좀 사달라고 하면 이미 돈을 다 쓰고 없다는 형이었지만 내가 먹을 라뽂이 컵라면 두 개를 한 용기에 담아서 먹으려고 하면 한 입만 하고 어디선가 나타난 형. 황금 같은 10분의 쉬는 시간은 형의 방해로 늘 여유롭지 못했다. 우리 형제에게 쉬는 시간은 매점 아니면 농구였다. 1~2교시가 끝나면 배가 이미 고플 대로 고팠기 때문에 점심은 이미 그때 다 먹어치웠다. 점심에는 무조건 농구하러 갔다. 형이랑은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에 늘 마주친 셈이다.


[평소에 즐겨먹는 육개장]


방학 때의 식욕은 더 왕성해졌다.


부모님께서 계시지 않는 날에는 밥을 올려놓고 무조건 편의점으로 향했다. 일단 라면 5개, 스팸 큰 거 하나 구입. 각자 마실 우유 한통씩과 주유 한통씩. 한통이라 하면 1,000ml 이상을 말한다. 이게 우리의 흔한 점심 식사였다. 다 먹은 후에는 낮잠을 자던가, 아니면 농구였다. 오전에 한번 농구하러 나갔다 하면 밤 10시, 11시는 기본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먹은 음식이 이미 소화되고 없었, 밥을 먹고 돌아서면 배가 고플 수밖에 없었다.


[부산역에 도착하면 항상 먹게 되는 라면에 돈가스 김밥. 적어도 강의를 마칠 때까지는 든든하다]


당시에 운동량이 많던 나는 배가 늘 고팠다. 게다가 편식도 하지 않고 뭐든 주는 대로 잘 먹었기 때문에 까다롭지 않은 입맛을 가지고 있었다.


중고등학교 때엔 어머니께서 볶음밥을 해주시면 늘 2~3인분을 해주셨다. 그렇게 먹어도 활동량이 몇 배나 되었기 때문에 섭취한 양의 무게는 다음 끼니가 채 오기도 전에 사라지고 없었다.


신검을 받을 때에도 저체중이었다.


나름 날렵한 몸과 체력을 자랑했지만, 제대 후 끊어진 무릎의 십 대 인대로 인하여 모든 게 180도 달라지고 말았다. 사람의 심리가 무서운 게 한번 수술을 받아보니, 또 다칠까 봐 두려움이란 게 생겼다. 그 뒤에 심한 운동은 피하게 되고 웬만해서는 몸을 사리게 되었다.


그 뒤로 평소 몸에 쌓여있던 근육량은 급속도로 줄게 되었고, 대사량도 예전같이 않게 되었다. 먹는 양만 그대로였기에 이제는 먹는 대로 전부 살로 가는 듯 몸은 계속해서 불어나게 되었다. 그래도 다행이었던 게, 평소의 운동량 덕분이었는지 수술 후의 놀라운 회복력은 진찰을 해주시던 의사 선생님을 당황시키게 했다.


여전히 먹는 것을 좋아하지만 한번 끊어버린 운동은 다시 하기가 쉽지가 않다. 한땐 자랑하던 끈기와 지구력은 온데간데없고, 그렇게 좋아하던 농구도, 그리고 스키도 이제는 잘 안 하고 타지 않게 되었다.


원래는 왕자가 있어야 할 자리에 이제는 축 늘어진 뱃살만 있고, 나도 한때는 팔 굽혀 펴기를 안 쉬고 한 번에 100개는 했었는데... 하지만 이제는 10개 하기도 버겁다.


몸이 예전 같지 않아 아쉬운 마음을 잠시 갖지만

오늘도 아내랑 어떤 맛있을걸 먹을까 행복한 상상을 하며 행복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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