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결혼식

5월의 어느 날.

by 해시태그

우리는 10년 전에 만났다. 그때 우린, 어렸고, 잘 몰랐다. 그래서 '악의'라는 것을 품을 '마음의 공간'이 없었고, 그것을 품는 사람을 가려낼 눈도 없었다. 그런 사람이 있다고 생각지도 않았다. 보이는 것을 보았고, 진실을 믿었다. 진실이 아닐 수 있음을 의심했지만, 그 시절 우린 사람을 의심하거나 의중을 파악하려 애쓰는 일은 하지 않았다. 서로를 탐색하지 않았다. 낯선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초짜'들이었다.


그 해엔 많은 일이 있었다. 역사를 다시 쓸 피겨퀸은 그 해에 눈부시게 등장했다. '김연아'라는 존재로 인해 어두컴컴했던 사람들의 가슴속에서 투명한 유리알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있었는지 조차 몰랐던 자부심 같은 것도 꿈틀거렸다. 물론 나의 일은 아니었다. 10년 후의 오늘까지 이어졌고, 지난 13개월간 80명이 넘는 사람들을 불러 조사했음에도 '증거 불충분'으로 갖은 의혹에 대한 재수사는 진행하지 않기로 한 여배우의 사망 사건도 그 해에 수면 위로 올라왔다. '장자연 리스트'라는 것에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떠올랐다. 소문은 무성했고, 합리적 의심을 품었지만, 사건은 사라졌다. 그때도 지금도.


나의 일상에 대단한 사건은 없었다. 그 무렵 왕복 8차선 도로를 하루에 두 번씩 지나다녔다. 그 길은 출퇴근 시간과 주말 동안 최악의 교통체증에 시달렸다. 정작 거리를 오가는 사람은 드물었다.


토플 수업이 끝나면 학원에서 몇 시간 공부를 한 뒤 643번 버스를 탔다. 버스 안에서 바라보는 그 길은 너무도 고요했다. 지나는 사람도 차도 드물었다. 황량한 8차선 도로를 향해 쏟아지는 햇살은 눈치 없는 친구들 같았다.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어쩐지 다른 곳에 있는 것 같았다. 그때엔, 아마도 지금이 내 인생의 최악의 날일 거라고, 이보다 더 최악은 없을 거라고, 그러니 앞으로는 지금보다는 나을 거라는 근거 없는 희망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어수선한 마음과는 상관없이 창 밖은 늘 고요했고, 햇살은 눈부셨다.


직장은 구하지 못하더라도, 직업은 가지고 싶었던 내게 직장도 직업도 생겼다. 최종면접을 보고 406번 버스를 타고 돌아오던 그날도 643번 버스를 타고 다니던 날들처럼 기분 좋은 날씨였다. 어쩐지 슬프다는 감정에 빠져들었다. 간절한 마음과는 상관없이 세상은 좋은 날씨에 들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첫 출근을 하던 날, 그제야 우리는 처음 만났다. 여름이었다. 회사에서 사용하는 이메일 계정을 만들었다. 포털 사이트나 SNS와는 달리 내가 원하는 아이디를 이메일 주소로 쓸 수 있다는 사실은 '경이'로웠다. 숫자와 이니셜 조합에 지쳐가던 때였다. 내게 '직장인'이 된다는 것은 쓰고 싶은 아이디를 얼마든지 쓸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런 기회가 오리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던 터라, 얼렁뚱땅 놓쳐버린 상황에 아쉬움이 남았다. 그래도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좋았다.


우리는 나란히 앉아 연봉계약서를 작성했다. 의례적인 말들이 오갔다. 연봉에 대한 부분은 다른 사람에겐 발설하면 안 된다, 연봉 계약은 1년 단위로 이뤄진다. 그때에 난 옆자리에 앉아 사인하는 그녀의 연봉 계약서를 흘깃 쳐다봤다. 우리의 연봉은 같았다. 사실 난 안도감을 느꼈다. 그러자 동질감이 왔다. 우리는 같은 길에서 같은 위치로, 함께 시작했다.


그토록 가지고 싶었던 것을 가진 이후 모든 절망은 착실히 찾아왔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마음먹을 수 있던 시절은 짧았다. 끝 모를 수치와 모멸에 좌절했다. 스스로도 알지 못했던 한계를 직면하는 것,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취업의 문턱을 넘는 것보다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럴 때마다 모자람을 들키지 않기 위해, 쓸모를 인정받기 위해 경주마처럼 달렸다. 하지만 어쩐지 점점 더 볼품 없어졌다.


그 10년의 시간에 우리는 함께 했다. 우린 알고 있었다. 우리의 마음은 우리 말고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두 사람 말고는 어디에도 의지할 데가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시간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서툴렀던 날들을 지나며 우리는 조금 더 세련되고 자연스러워졌다.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이 어색해 눈길을 피하며 웃어넘기려 하는 초짜 티도 벗었다. 점점 영악해졌고, 때가 묻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방법도 익혔다. 하지만 영악하게 굴지 않으려, 더 많은 때를 묻히지 않으려 우린 때때로 발악했다. 뻔뻔해지지 않으려 뻔뻔한 인간들을 향해 열심히 손가락질했다. 그럴수록 생채기가 많았다. 버티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함께였다.


우린 여전히 많은 것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긴 시간 많은 것을 공유했다. 다른 사람들에겐 차마 말하지 못하는 것들을 아무렇지 않게 꺼냈다. 그러다 웃기도 하고 울기도 했던 것 같다. 울지 않아도 울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의 가장 큰 수치와 자괴는 한 곳에서 비롯됐기에 다른 것들은 부끄럽지 않았다. 우리에게 누추한 것은 그것뿐이었다고, 그렇게 믿고 있다.


함께 한다는 것은 같은 기억을 공유하고, 같은 시간을 산다는 뜻인지도 모르겠다. 아름답게 빛나는 너의 뒷모습엔 우리가 버텨낸 시간의 흔적들이 촘촘히 박음질돼 있었다. 그 모든 시간들이 지금의 단단한 너를 만든 것일까. 너는 웃는데, 나는 울 것만 같았다.

돌아보지 못한 10년의 시간들이 떠올랐다. 그 시간엔 언제나 그녀가 있었다. 넌 나에게, 난 너에게 언제나 첫 번째는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두루뭉술해 물러보이는 너는 알고 보면 송곳 같은 논리를 안고 있고, 그보다 더 섬세한 감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까지도 10년이 걸렸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너는 나에게 때때로 나였기에 알려고 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런 네게 난 가끔씩 무례하고 종종 배려 없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는 내게로도 천천히 스며든 사람이었다.


전하고 싶은 말들이 많았다. 괜히 한 번 그래 보고 싶었다. 너의 가장 행복한 날을 축하할 수 있어 더없이 기쁘다고. 누군가의 행복을 진심으로 기뻐하고, 그런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있어 행복하다고. 어쩐지 그녀의 등 뒤로 유리알 같은 햇살이 따라가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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