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 선택적 계획형인 사람

성향을 극복하고 싶은 1人

by 자청비


시작이 힘들다면, 내가 생각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거칠게 쓰는 것이다. 쓰고 싶은 것을 일단 가장 직설적인 방식으로 써보자. 투박하고 울퉁불퉁해도 상관없다. 우리는 지금 시작의 어려움을 겪오 있을 뿐이다. 일단 써낸 다음 보완하면 된다. 심지어 모조리 지워버려도 관계없다. 정말로 쓰려는 것을 쓰고 나서 고치고 다듬으며 더 나아지는 과정을 거치는 것, 이것이 긍정적인 순환임을 알게 되리라. p85 [오직 쓰기 위하여-천쉐]


이 문장을 맞닥뜨렸을 때, ‘그래! 그냥 무작정 쓰자!’ 싶었다.

소설이든, 에세이든, 답이 없는 글이든, 무엇이든 그냥 써보는 거다. 이건 글쓰기만의 일이 아니다.

무엇을 하든 거창한 계획을 먼저 세세하게 세우다 보면, 계획을 세우는 것만으로도 이미 지쳐버린다.

계획은 세우지만, 그 뒤로는 좀처럼 실행하지 못한다. 그게 바로 나다. 계획적인 나는 계획이 없으면 오히려 불안해진다.

하지만 나는 선택적 계획형 인간이다. 모든 일에 계획을 세우지만, 어떤 순간에는 계획을 내려놓기도 한다.

상대방이 철저한 계획형 인간일 때, 혹은 내 계획이 전혀 소용이 없을 때는 오히려 계획을 포기한다.


내가 계획형 인간이라는 사실도 얼마 전에서야 깨달았다. 친구와 MBTI 이야기를 하다가 알게 되었다.

나는 늘 큰 틀의 중요한 일정들을 중심으로 계획을 세우는 사람이라는 걸.

그래서 처음에 계획이 틀어졌을 때, 나는 유난히도 힘들어했다.

거기에 완벽주의 성향까지 더해지니 스스로를 더 몰아붙이게 되었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내가 즉흥적인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런데 가만히 돌아보니, 그건 완전한 착각이었다.

한참 유행하던 내일로 여행을 떠나기 위해, 나는 일주일 전부터 A4용지 몇 장을 채워가며 계획을 짰다.

대략적인 시간, 머무를 곳, 출발 시간, 해야 할 일까지 모두 세세하게 적어두었다.


결혼 후, 호주살이에 실패한 김에 캠핑카 여행을 하며 한국에 돌아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호주는 캠핑카가 정박할 곳을 미리 예약해야 하는 시스템이었고, 나는 영어도 제대로 못하면서 이동 루트부터 숙박지, 관광 일정까지 전부 계획해서 움직였다.

그러면서도 나는 나 스스로를 ‘즉흥적인 사람’이라고 믿고 있었다는 게 지금 생각하면 참 신기하다.


아이를 낳고 양육하면서, 나는 내가 계획형 인간이라는 걸 조금씩 체감하게 되었다.

동시에 수많은 변수 앞에서 계획대로 되지 않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연습도 해야 했다.

계획이 어그러질 때마다 마음을 다스리는 일도 내 몫이 되었다.

그렇게 11년이 흘렀고, 나는 지금의 선택형 계획적인 사람이 되었다. 어쩌면 원래도 선택형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이제 나는 아이들을 중심으로, 큰 틀의 계획만 세운다.

변수는 그때그때 맞춰가며 움직이되, 큰 흐름에서는 벗어나지 않으려고 한다.

내가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들도 아이들의 일정 속에 조심스레 끼워 넣는다.

한 번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어떻게든 해내는 편이라, 이 역시 완벽주의 성향의 결과일 것이다.

하지만 이 성향 덕분에 꾸준함 하나만큼은 끝까지 붙잡고 가는 힘이 생긴다고 생각한다.


글쓰기 역시 마찬가지다.

무작정 냅다 써 내려가듯, 선택적 계획형이든 완벽주의든, 나는 여전히 큰 틀의 계획을 세우되, 일단 실행해 보려고 애쓴다.


이제는 실패를 예전만큼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떤 실패든 수용하고, 다시 나아갈 힘을 얻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며 마음가짐을 다시 잡아본다.

2025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새해라고 특별할 것도, 연말이라고 특별할 것도 없다. 그저 하루가 감사이고, 하루가 기적임을.


계획대로 되지 않고, 완벽하지 않더라도 오늘을 열심히 살았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기쁘고 감사한 하루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