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낭비일까 아니면 쟁여두는 걸까

30대가 되어서야 나를 이해하게 된 시간들

by 자청비

나는 똑같은 옷, 똑같은 음식, 똑같은 간식이 주어지면

망설임 없이 쟁여놓는 쪽을 선택한다.

그래야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이다.


혹시나 내가 좋아하던 옷이 해지거나 망가지면 어쩌지,

그런 ‘만약’을 먼저 떠올리다 보니

마음에 드는 옷은 여러 벌씩 같은 걸 사둔다.

하지만 결국 처음 입었던 옷만 입게 되고,

똑같은 옷들은 새것 그대로 옷장 안에 남아 있다.


음식도 다르지 않다.

사놓고 아껴 먹다가, 결국 유통기한이 지나 버리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다 보니 이미 사둔 걸 잊고, 똑같은 음식을 또 사고, 또 사게 된다.

뭐가 있는지조차 잘 모르니까.

간식도 마찬가지다. 잘 먹지도 않는 간식인데도

여러 개를 쌓아두고서야 안심이 된다.


화장품은 공구 때가 가장 싸다고 생각해

몇 달 치를 한 번에 사둔다.

그렇다고 팍팍 쓰는 것도 아니다.

엄청 아껴 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낭비하는 사람일까?

낭비를 정말 싫어하는데,

왜 이렇게 쌓아두지 않으면 안절부절못할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는 그저 싸다는 이유로 쟁여놓는 사람이 아니라

‘잃고 싶지 않아서’ 쌓아두는 사람 같았다.


쟁여놓는 마음은 욕심이 아니라

나의 불안과 결핍의 기억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지금 당장 필요하지 않아도 ‘없어질까 봐’,

지금 써도 되지만 ‘더 필요할 날이 올 것 같아서’,

오늘 먹어도 되는데 ‘나중에 찾게 될까 봐’

나는 늘 소비를 미루는 방식으로 안정감을 만들어왔다.


그건 ‘지금의 나’보다

‘미래의 나’를 더 중요하게 여겨왔기 때문이다.

더 힘들 날의 나,

더 지칠 날의 나,

더 필요할 것 같은 미래의 나를 위해

현재를 계속 미뤄두다 보니

자연스럽게 쌓아두게 된 것이다.


이건 낭비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허락’의 문제였다.


이건 지금 써도 되나?

나한테 이 정도는 괜찮나?

더 중요한 순간에 써야 하는 건 아닐까?


나는 이런 질문을 무의식적으로 반복하며

나 자신에게 사용 허락을 잘해주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럼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아주 단순했다.

지금의 나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


그리고 쌓아두다 버리게 되는 나를 자책하지 않는 것.

그건 잘못이 아니라,

살면서 늘 대비해야 했던 사람이

자연스럽게 몸에 익힌 습관이라는 걸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나니

조금씩 달라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쌓아두는 대신,

그때그때 잘 사용하는 연습을 해야겠다고.


미래의 나를 위해 미뤄두던 것들을

오늘의 나를 위해 당장 사용해 보는 연습.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