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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러너 Jun 12. 2024

저기.. 이에 섬에서 따뜻한 밥 한 끼 같이 드실래요?

섬 안의 작은 섬, 오키나와 이에 섬 그리고 따뜻한 마음 한 스푼

여행 둘째날 일몰. 고래모양 구름

어쩌다 오키나와에 왔다. 고3이 된 첫째 딸과 둘만의 5박 6일 여행이다. 아이가 크면서 내가 아빠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고민이 많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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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에 입국해서 공항에서 멀리 떨어진 북부 오리온 모토부 리조트에 숙소를 잡았다. 몸과 마음을 좀 쉬려고 바다가 보이는 숙소로 내리 연박을 잡았다. 뚜벅이라 동선은 단출하다. 오키나와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한 위치를 도착해서 알았을 정도로 장소를 정한 지 5일 만에 추진한 묻지 마 여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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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철 비수기라 날씨 빼고는 다 좋다. 첫날 토요일은 오자마자 숙소로 이동해서 쉬느라 휙 지나가고, 둘째 날인 일요일은 너무 날씨가 좋아서 비세자키 해변 스노클링 후 열대드림센터(식물원)에 다녀왔다. 다음날 월요일 날씨를 보니 오후에 비소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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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로 가볼까? 차가 없으니 북부 주변을 다니는 게 효율적이다. 다녀보니 대중교통 시간이 제한적이고 금세 어두워져서 늦어도 오후 8시 정도엔 숙소에 들어와야 안심이다. 이미 숙소 앞이 해변이고 근처가 스노클링 포인트라 비슷한 명소는 갈 필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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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리조트 창밖에 보이는 바다 저 멀리 보이는 혹 같이 튀어나온 산이 눈에 띈다. 저기는 어딜까? 섬 밖의 섬. 섬 안의 섬. 찾아보니 이에 섬이다. 제주도와 우도 같은 느낌. 근처 모토부항에서 배 타고 30분이면 가는 섬. 호기심이 생겨서 가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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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섬의 상징이자 이에섬의 작은 산인 닷츄(城山). 기다려, 닷츄! 내가 오늘 너를 꼭 만나러 갈게! 딸과 무사히 9시에 모토부항에서 떠나는 배를 타고 9시 30분에 이에 섬에 도착했다. 바로 앞 렌털 샵에서 전기자전거를 빌려서 이에 섬 투어를 시작했다. 날씨가 너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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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 비치에 가보려다 실수로 길을 잘못 들어서 이에 비치(IE비치)로 왔다. 청소년 수련관이 붙어 있어서 입장료를 내야 한다고 해서 다시 나왔다. 구글 지도를 켜고 안내 멘트를 들으며 GI비치에 도착했다. 맑은 물에 발을 담그고 놀다가 근처에 있는 절과 니야티아 동굴에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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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 30분쯤 와지 해변 전망대 보러 갔다가 헷갈려서 절벽 아래쪽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위로 올라오는데 후드득 비가 떨어지기 시작한다. 우비를 입어도 소용없는 강한 폭우다. 세찬 비바람에 눈은 안 떠지고 빗물이 휴대폰에  때마다 화면이 움직여서 구글지도 경로 안내가 멈춘다. 비상상황, 총체적 난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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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물로 눈이 따가워서 두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다. 애꾸눈처럼 한쪽 눈을 감고 찡그린 채 가까스로 자전거를 운전한다. 뒤따라오는 아이가 걱정되지만 내 앞가림도 급급해서 그저 무사히 따라오기만 바라본다. 이미 온몸과 신발은 쫄딱 젖은 지 오래이고, 죽기 살기로 페달을 밟는다. 차도에 차가 없어서 천만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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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난리통에 갑자기 눈앞에 이에섬의 상징인 산 정상(닷츠라고 부름)이 떡하니 나타난다. 비가 와서 어차피 하이킹은 어려운 상황이니, 비를 맞더라도 잠시 내려서 기념사진이라도 남기기로 했다. 이미 쫄딱 젖고 신발도 다 젖은 상황이라 닷츄 산행일정은 취소하고  바로 자전거부터 반납하러 대여점을 향해 다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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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우 속 자전거에서 내려 닷츄와 만난 순간


가까스로 대여점에 복귀해서 자전거를 반납했다. 비는 잠시 소강상태다. 춥고 고파서 미리 점찍어둔 Ace 햄버거집으로 향한다. 폭우가 다시 내리기 시작한다. 딸아이가 코인 빨래방에서 비를 피하는 동안 패밀리마트에서 우산을 사 온다.  다시 햄버거집을 향해 10분 여를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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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식당 Ace버거에 도착했지만, 느낌이 싸하다. 쉬는 시간이다. 구글 검색으로 주변에 평점이 괜찮은 식당을 찾아본다. 다시 15분을 걸어서 두 번째 식당인 Tomari Shokudo(とまり食堂) 식당에 도착했다. 여기도 오늘은 영업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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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힘이 빠지고 다리가 풀린다. 영업 중으로 표시되는 식당을 찾다가 あずましい家(단란한 집)이라는 식당이 눈에 띈다. 한참을 걸어서 세 번째 식당인 あずましい家(단란한 집)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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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길을 잘못 들어서 조금 돌아가니 식당 간판이 보인다. 반가운 마음에 달려가서 문을 두드리니, 뭔가 바쁘게 그릇을 씻고 정비 중이다. 파파고 번역기로 지금 식사되는지 여쭤보니 오늘은 쉰다고 다. 눈앞이 캄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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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8시 이후로 6시간 20분 동안 먹은  하나 없이 자전거를 3시간 정도 타다가 비를 쫄딱 맞고 젖은 채로 40분을 걸었지만, 찾은 식당 세 군데가 모두 영업을 안 해서 망연자실했다. 딸아이도 나도 이미 너무 지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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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답한 마음에 다시 파파고 번역기로 あずましい家 식당에  혹시 주변에 지금 식사 가능한 식당이 있는지 물었다. 난감한 표정으로 지금은 거의 브레이크 타임이라 어렵다고 하신다.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식당에서 나오며 딸에게 편의점에서 뭐라도 먹자고 했다. 딸도 나도 몸이 천근만근이고 완전히 피로가 쌓여서 멍해졌다. 말없이 또 걷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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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째 식당에서 나와서 편의점을 찾아 터덜터덜 걷고 있다. 갑자기 발소리가 들리더니 방금 마지막으로 들린 세 번째 식당(あずましい家) 따님이 뛰어와서 다급히 묻는다. 정확하게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지금 바로 식사할 수 있는 식당을 찾았다고 했다. 그는 우리가 간 뒤에도 주변 식당에 전화를 걸어 알아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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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가는 것이 불편하지만 않으면, 지금 자신들의 차를 타고 같이 가서 식사를 하자고 다. 지금 우리가 가려는 식당 이름은 버디하우스라고 했다. 그분들의 따뜻한 마음과 진심 어린 도움의 손길이 느껴져서 감사히 호의를 받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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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앞 좌석에는 식당의 두 남자분이 앉고, 뒤에는 우리 둘과 식당 따님까지, 총 5인이 탄 자가용이 빗속을 뚫고 어디론가 향한다. 걸어서 가기에는 생각보다 식당이 다. 창밖으로 아까 인증사진을 찍은 닷츄가까이에 성큼 다가와있다. 그분들께 아까 물난리통에 닷츄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파파고로 소통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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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걱정이 된다. 4시 정각에 이에섬에서 모토부항으로 떠나마지막 타야 하는데 이렇게 멀리 가도 늦지 않을까? 그 배를 타지 못하면 이에 섬에서 숙박을 따로 잡아야 하는 난감한 상황이다. 만일 그냥 식당에 내려주고 가밥을 먹을 수는 있지만, 제시간에 이에섬 여객터미널돌아갈 방법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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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하다가 파파고로 지금 상황을 말씀드리니, 다 알고 있으니 빨리 먹고 시간 맞춰서 데려다준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뿐만 아니라 환송까지 해주시겠다고 환하게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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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로  3.9km를 이동해서 バーディーハウス(버디 하우스)도착했다. 배가 너무 고파서 돈가스 정식 2인분을 시켰다. 잠시 커피를 마시는데, 단체사진을 찍자고 하셔서 셀카모드로 찍었다. 너무 감사해서 괜히 저희 때문에 식사시간까지 앞당기신 것은 아닌지 물으니 그건 아니라고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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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큰 행사로 대부분의 식당이 참가해서 오늘은 영업을 안 하고 거의 쉰다는 것 같았다. 본인들도 아빠와 딸인데 오늘은 영업을 하지 않고 정비하느라  온종일 식사 못해서 지금 아침 겸 점심 먹는 거라고 웃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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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아빠가 파파고로 '딸에게 돈도 안 주고 밥도 안 먹이고 공짜로 일을 시킨 나쁜 아빠'라고 써서 보여주셔서 나도 '돈을 버는 것은 모두가 힘든 일이네요.'라고 써서 보여드렸더니 박장대소하며 한참 동안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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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3 수험생인 딸과 같이 이번 이에섬 관광여행왔다고 말씀드렸다. 그가 오늘 숙박이면 맥주를 마셨을 텐데 아쉽다고 웃는다. 파파고에 이미 우리는 친구라고 써서 보여준다. 참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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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개처럼 맛난 식사를 마치자 3시 25분이 되었다. 계산을 마치고 차에 타니 오늘 안 가본 곳을 물어보고,  처음에 우리끼리 잘 갔다가 입장료를 내라고 해서 안 갔던 ie해변으로 향한다. 섬 주민은 무료인데 자기들과 같이 가니 내지 않아도 된다고 웃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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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E해변 포토존에서. 현지 주민 세 분과 딸과 나

여기 사진 스폿이 있으니 찍고 가자하셔서 타이머같이 사진을 찍고, WELCOME 알파벳 한 글자에 한 명씩 서있는 포즈로 찍자고 부탁드려서 한 장을 더 찍었다. 사진을 보내드리고 싶어서 생각해 보다 인스타그램 식당 계정이 있다고 하셔서 서로 팔로우하고 사진을 보내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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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시 52분에 무사히 여객터미널에 도착했다. 라커 짐보관함에서 짐을 찾고 무사히 배를 탔다. 밖에 항구에 서서 계속 손을 흔드신다. 같이 큰 소리로 뭔가 응원의 구호외치시기도 하고 우리가 작은 점으로 사라질 때까지 계속해서 손을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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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안보일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신 세 분

나는 그저 감동받았다. 세 분 모두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팔 아픈지 모르고 가족을 환송하듯 우리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 손을 흔드시는 모습에, 내가 낯선 이곳에서도 언제나 따뜻한 도움과 환영을 받고 있음에 감사하고 울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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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일본어로 dm이 왔다. 번역하니 '지금의 기적은 깜짝 선물입니다. 평소에는 울지 않습니다.'라는 뜻이다. ㅠ 정말 따뜻하신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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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dm으로 답했다. '저도 오늘 딸아이와 오늘 자전거 여행 도중에 비를 쫄딱 맞고 옷도 다 젖어서 겨우 자전거 반납하고, 편의점에 가서 우산을 사고 늦은 점심을 먹으려고 하다 너무 따뜻하신 분들 만날 수 있어 감동이에요. 오늘 소중한 세 분을 만나려고 그렇게 폭우가 왔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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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다시 답글을 남겼다.

"저야말로 멋진 만남과 즐거운 시간, 감동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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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섬에서의 따뜻한 식사 한 끼. 현지 분들과 찍은 인증사진. 뱃시간 때문에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서 번갯불에 콩 볶듯 흡입한 돈가스 정식. 파파고로 번갈아 주고받으며 웃음 나누던 대화들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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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북부 이에 섬과 우뚝 서있는 닷츄(城山)

어쩌면 닷츄(城山) 해발 172미터의 작은 바위 산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따뜻함이 모여 우뚝 서있는 마음의 고향이 아닐까. 오키나와 이에 섬과 닷츄, 딸과의 우중 자전거 여행, 삼고초려 후 따뜻한 도움의 손길과 맛난 식사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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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을 때까지 맞으며 응원하고 손 흔들어주신 천사 같은 가족식당 あずましい家(단란한 집)을 잊을 수가 없다. 다음엔 꼭 거기서 식사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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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잊지 않아야 할 건 하나뿐이다.

가끔씩 세상은 눈물겹도록 따뜻하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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