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분식집4
"그럼 넌 이제 어떻게 할 거야?"
환이 선주에게 물었다.
"뭘 어떻게 해?"
"그 <연화각>이라는 기방에 계속 있을 거야? 아무리 춤만 추더라도 취객들을 상대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닐 텐데..."
"그리고, 너의 친오빠로서 어린 네가 그런 곳에서 일하는 것도 영 탐탁지 않고..."
선주는 환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더니, 이내 오빠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편안한 말투로 덤덤히 대답했다.
"물론 처음에는 나도 쉽지 않았지만... 그것도 이젠 익숙해져서 하나도 불편하지 않아!"
하지만, 환에게는 그런 선주의 말이 전혀 들리지 않는다. 아무리 그래도 기방이라니?
환은 그저 속상한 마음만 들 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난 네가 그곳에서 빨리 나왔으면 좋겠어. <기방>이라니... 엄마가 아시면 얼마나 속상하시겠니?"
"오호~ 지금 오빠노릇 하려는 거야?"
"장난치지 마! 난 지금 진지해."
걱정하는 자신을 향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장난을 치는 선주에게 환은 크게 화를 냈다.
하지만 선주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여전히 침착함을 유지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야 물론 나도 빨리 나오고는 싶지."
"그럼, 고민할 필요도 없네! 오빠랑 같이 가서 당장 짐 싸서 나오자!"
"그런데 오빠? 그게 그리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야!"
"왜? 어째서?"
"내가... 지금 있는 연화각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거든! 특히 행수어르신한테는..."
"안 그랬으면 내가 지금 어떻게 되었을지... 아마 이렇게 멀쩡하게 오빠를 보기가 힘들었을 거야."
"아무리 그래도..."
"은혜야 갚으면 되잖아?"
"그것도 그건데, 당장 내가 나오면 어디에서 지낼 건데?"
"그야... 지금 있는 분식집에서 어떻게든..."
"그건 오빠 생각이고!"
선주는 환이 말을 너무 쉽게 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건, 아마도 조선에서 크게 고생한 자신과 달리 오빠는 운이 좋았기 때문이리라.
"그 분식집은 <연아>라는 사람이 주인인거지?"
"뭐... 주인이라고 할까, 아니라고 할까... 어쨌든 주인집 딸...이고, 본인이 실제 운영을 하고 있으니까... 그렇다고 할 수 있지."
"그렇구나..."
"집이라면 걱정하지 마! 우리 살 집은 내가 어떻게든 알아서 할 테니까..."
"오빠!"
"응?"
"오빠가 정말 중요한 사실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은데..."
"뭘?"
"여긴 조선이야! 우리가 살던 서울의 달동네가 아니라고!"
정곡을 찌르는 선주의 말에 환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끄응..."
"우리가 여기서 안전하게 지내려면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해!"
"여기서 잘 버티고 있어야만! 우리가 안전하게 잘 살아야만! 그래야, 미래든 어디든..."
".........."
"그렇지?"
"그리고... 아직 동한오빠나 철물점 아저씨의 소식도 모르잖아?"
"아... 맞다..."
선주의 입에서 나온 두 사람의 이야기에 환은 깜짝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최근 바쁘게 지냈다고는 하지만, 그가 두 사람에 대해서 까맣게 잊고 지냈기 때문이다.
"휴..."
"그러려면 정보는 많을수록 좋을 테니..."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오빠의 분식집이나 내가 있는 기방이나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곳이잖아?"
"그렇지..."
"게다가 분식집과 기방은 손님의 성격도 신분도 서로 다르니까..."
"우리가 정보를 수집하는데 이보다 더 좋은 환경은 없을지도 몰라..."
"확실히... 듣고 보니 그렇구나!"
"오빠 생각에도 그렇지?"
"응..."
환은 선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너, 그동안 이곳에서 대체 무슨 일을 겪었기에..."
"뭐가?"
"생각이나 말하는 것이 너무 꼼꼼하기도 하고... 어른스럽기도 하고... 내 동생 선주는 원래 이런 캐릭터가 아니었는데..."
갑작스러운 환의 말에 선주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하하하하하~"
"오빠! 오빠만 몰랐을 뿐이지, 나 원래 이렇게 차분하고 냉철한 성격인 것 주변 사람들은 다 아는데?"
"그랬나?"
"당연하지! 엄마도 나보고 항상 차갑다고 하잖아!"
"흐응..."
"그리고, 나 중학교 때까지는 공부 잘했던 것 알지?"
"내가 아이돌 준비만 안 했으면 고등학교 때도 공부 잘했을걸?"
"하긴... 네가 어릴 때부터 머리가 좋고 총명하긴 했었지!"
"호... 웬일로 이리 쉽게 인정을 해주신대? 알면 됐어!"
"그러니까 오빠! 차분하고 냉철하고 머리 좋은 동생이 말하는데... 우리, 일단 각자의 장소에서 상황을 더 지켜보도록 하자!"
"그래..."
"좋아!"
"대신..."
"대신?"
"언제든 기방에서 더 못 버티겠으면 바로 나와야 한다?"
"알았어! 걱정하지 마~"
"음..."
비록 두사람이 합의 하에 결론을 내렸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환의 마음은 여전히 불편했다.
"그건 그렇고! 오빠, 나 배고파!"
"그... 그래?"
"가자! 우리 선주 뭐 먹고 싶어? 오빠가 먹고 싶은 것 다 해줄게!"
"내가 먹고 싶은 것?"
"당연히 라면이지!"
"그래! 오빠가 라면 끓여줄게 어서 가자!"
"와~ 얼마 만에 먹는 라면이야? 나 너무 기대된다. 두 개 끓여줘 오빠!"
"너 먹고 싶은 만큼 만들어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긴 대화를 마치고 마음이 홀가분해진 남매는 함께 분식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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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루룩 -
"크으... 아... 너무 맛있어! 진짜 비슷하게 잘 만들었네?"
선주는 오랜만에 먹는 라면이 정말 맛있는지, 먹는 내내 연신 맛있다는 소리를 했다.
"그렇지? 내가 그 국물맛 내고 면발 살리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그러게? 엄청난데?"
"당연하지! 내가 누구야? 나 김환이야!"
"허세는 여전하셔!"
"하지만... 이건 인정 안 할 수가 없네! 인정! 인정!"
이때, 식사를 하는 선주를 곁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정훈이 조심스레 말을 걸어왔다.
"저기... 아씨! 진짜로 우리 환사부 누이예요?"
"그래! 진짜 누이 맞아!"
"왜 그러니?"
"그게... 전 여태껏 아씨처럼 곱게 생긴 사람은 본 적이 없거든요... 아까 처음 보고 어찌나 놀랬던지? 아 글쎄 선녀가 우리 분식집에 온 줄 알았다니까요?"
"그러니? 아하하하~ 고맙다, 얘!"
정훈의 칭찬이 기쁜지 선주는 크게 웃었다.
"그런 아씨가 우리 환사부의 누이라니까 영 믿기지가 않아서..."
"뭐야? 정훈이 너 선주한테 너무 잘 보이려고 그러지 않아도 돼!"
"잘 보이긴요? 사실이 그런 걸?"
"오늘 아침까지는 지혜아씨가 제일 곱다고 생각했는데... 선주아씨를 보고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야! 야! 얘가 아직 어려서 뭘 모르네? 지혜아씨가 훨씬 낫지! 어디 얘 하고 비교를..."
"뭘 모르는 건 사부인 것 같은데요?"
"뭐야?"
"지혜아씨가 누군데?"
정훈의 입에서 나온 '지혜'라는 이름의 존재가 궁금해진 선주.
"아... 있어! 우리 집 음식을 정말 좋아하는 아씨인데... 어찌 보면 은인이라고 할까?"
"은인?"
"응! 우연한 일이었긴 한데... 결과적으로 그 아씨를 위해서 내가 볶음밥을 처음 만들었으니까..."
"흐흥... 그랬어? 아씨를 위해서...?"
"그런 것 아니니까 이상한 생각 하지 마셔!"
"그러시겠지~"
"지혜아씨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그러니까... 우리 분식집에서 내 볶음밥을 처음으로 맛본 손님! 손님이라고!"
"호... 무척 특별한 손님이신 거네?"
"에휴... 뭐 그렇다고 하자! 특별한 손님인 건 맞는 말이니!"
선주는 시끄럽게 환을 놀리는 틈틈이 연아를 조금씩 살펴보았다.
'하지만 이상하게 저쪽에 더 신경이 쓰인단 말이지...'
지혜보다는 함께 지내고있는 연아가 더 신경쓰이는 선주.
"그나저나... 넌 이름이 정훈이라고 하는구나?"
"예! 아씨!"
"아씨는 무슨. 그냥 <누나>라고 불러!"
"예? 뭐... 누... 누나요? 대체 그게 뭔 소리예요?"
"아... 그러니까.. 그건..."
선주는 정훈의 질문에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뭔가 결심한 듯 웃으며 정훈에게 말했다.
"아하하하~ 몰라! 기분이다!"
"정훈아! 누나... 는 내가 있던 곳에서 누님... 과 같은 뜻으로 쓰이는 말이야!"
"예? <누님>이요? 누님... 누나...? 뭔가 닮은 것도 같은데... 좀 어색하기도 하고..."
"뭐가 어색해! 아주 비슷하구먼! 자! 누나 해봐! 누! 나!"
"누... 나...."
"아주 좋아!"
선주는 잠시 후 쑥스러워하는 정훈에게 귓속말로 조용히 이야기했다.
"이건, 아마 한양에서 아무도 쓰는 사람이 없을거야! 그러니까 어때? <누나>라는 호칭은 너랑 나 사이에, 우리 둘이서만 쓰는 것으로?"
"둘... 이서만이요?"
"그래! 우리 둘! 왜 싫어?"
"아... 아니요! 이렇게 어여쁜 아씨한테 누님... 누나... 라고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하니 너무 좋아서..."
"그럼 좋아! 확정!"
"그런데... 옆의 그 아이는 너의 누이지? 아주 어여쁘구나? 이름이 뭐니?"
그러자, 정훈의 뒤에 꼭 붙어 눈치만 보던 진아가 부끄러운 듯 조용히 대답했다.
"저... 저는 진아라고 해요."
"진아?"
"얼굴만큼 이름도 아주 어여쁘구나."
"고맙습니다."
"아니 진아야? 너 왜 이렇게 수줍어해? 평소에 안 그러던 아이가?"
선주를 보고 수줍어하는 진아가 너무 귀여웠는지, 환이 놀리듯 짓궂게 말했다.
"아씨가 너무 고와서요..."
"아이고 말을 말자! 얘네가 오늘 왜 이러니?"
말은 그렇게 하지만, 선주를 칭찬하는 아이들의 말이 내심 기쁜 환!
"진아야?"
"예, 아씨!"
"앞으로 자주 볼 사이니까... 너도 나한테 아씨 말고 다른 말로 불러줄 수 있어?"
"예? 뭐라고요?"
"그러니까... <언니>라고 불러줄래?"
"예? 언... 니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언니는, 나 있던 곳에서, 여자가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손윗누이를 친근하게 부를 때 쓰는 말이야."
"예..."
"아씨는 그럼..."
"어허! 언! 니!"
"어... 언니는 그럼..."
"그렇지!"
"환사부랑 같은 곳에서 오셨겠네요."
"당연하지! 친오라비와 누이인걸? 너희처럼!"
"그런데 왜 그러니?"
"그냥... 그곳이 조선의 어느 지역인지는 몰라도, 참으로 신기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왜?"
"김밥이나 라면같은 신기한 음식도 그렇고..."
"그리고, 언... 니처럼... 환사부도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자주 하거든요."
"뭐? 내가?"
진아의 말에, 옆에서 김밥을 먹고 있던 환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응! 사부!"
"특히나... 그... 오... 케이...? 그건 대체 어디 사투리에요? 사부가 엄청 자주 하는 말인데... 화이... 팅?이라는 말도..."
"오케이...?"
"응! 그게 어디 사투리인지,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난 사부가 그 말 할 때 기운이 넘쳐 보여서 참 좋아요!"
"아... 사투리... 맞지... 하하... 그래... 고맙구나..."
오케이와 화이팅을 사투리로 받아들이는 진아의 말이 무척 재미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날카롭게 정곡을 찌르는 것도 같아 꽤나 당황한 환이었다.
'이 아이들이 어리고 순수해서 다행이었다고 해야하나... 나도 지금보다 좀 더 조심해야겠다!'
"그러니까 진아야! <언니>라는 말도 오직 너랑 나 둘만 쓰는 걸로? 괜찮니?"
"예. 좋아요 언... 니..."
"그래! 그래!"
"언니... 언니... 언니..."
'언니'라는 말이 신기한지, 아님 둘만의 약속이 생겨서 좋은지, 진아는 '언니'라는 말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그런 진아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선주.
하지만 환은 아이들에게 유난히 많은 말을 하는 선주가 조금 걱정이 되었는지 한쪽으로 따로 불러 조용히 주의를 주기로 했다.
"선주야, 어린아이들이라서 나도 그냥 생각 없이 지켜보기는 했는데... 이 시대에 쓰지 않는 말이라던가, 그다지 필요 없는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흥! 오빠나 잘하시지! 오케이?"
"그러게... 나도 모르게 습관처럼 나왔나 봐! 이제 조심해야지..."
"오빠! 물론 내가 오늘 기분이 좋아서 오버한 것일 수도 있는데... 난 이상하게 저 아이들에게 믿음이 가... 오늘 처음 보는 건데도 뭔가 친근하기도 하고..."
"그래?"
"우리처럼 남매라서 그런 걸까? 그냥 이상하게 저 아이들에게는 마음을 놓게 되네?"
"어떤 이야기를 해도 문제없을 것 같고... 비밀도 잘 지켜줄 것 같고..."
"알아! 물론, 정훈이와 진아가 정말 착하고 좋은 아이들이긴 한데...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그래... 알았어!"
"그나저나 오빠! 연화각에도 소문을 내줄 테니까, 김밥 좀 넉넉히 만들어서 싸줄 수 있어? 돌아갈 때 가지고 가게. 행수어르신이 특히 좋아하실 것 같거든..."
"그래야지! 고마운 분들이니, 인사도 할 겸 내가 맛있게 말아줄게!"
"<오케이~>"
"야... 그만하지, 이제?"
"아하하하하하~"
그간 쌓인 회포를 신나게 푸는 남매.
그리고 반대쪽 평상에서는...
아닌 척하고는 있지만, 실은 두 사람의 대화가 미친 듯 궁금한 연아가 건성으로 마늘을 까고 있었다.
'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