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저씨>는 인간에 대한 판타지다. 주인공 지안은 인간을 모른다. 인간을 본 적이 없었으니까. 지안의 엄마는 인간이라면 당연히 지켜야할 자식을 버렸다. 그렇게 버림받은 어린 아이에게 어른들이 보여준 것은 온정이 아닌 폭력이었다. 살기 위해서, 할머니와 자신을 위협하던 괴물을 죽였지만 세상은 오히려 자신을 괴물이라 불렀다. 그런 삶을 살아온 지안이 인간을 알 리가 없었다, 처음으로 “인간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어른 동훈을 만나기 전까진. 결국 이 드라마는 “인간이 대체 무엇이냐”고 묻는 지안의 절박한 질문이면서 그녀가 만난 유일한 인간, 동훈(feat. 후계동 사람들)이 들려주는 담백한 대답이다.
그 질문과 대답 자체는 별로 특별할 것이 없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명제는 그리스 비극 탄생 이후 생겨난 모든 드라마, 혹은 모든 문학이 묻고 답해온 질문이다. 오이디푸스가, 햄릿이, 노라가 물었던 질문을 오늘날의 지안이 다시 묻는 것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가 특별한 이유는 그 고전적인 질문에 대답하는 신박한 자세, 아주 투박하고도 진실된 방식에 있다. 이 드라마가 말하는 인간다운 인간은 ”내 식구 때리는 놈은 다 패주는” 사람, 내 편 일에는 앞 뒤 재지 않는 사람, 즉 누군가를 제대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다. 말 없는 동훈이가 맞고 들어오면 후계동의 모든 남자들은 때린 놈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냅다 달린다. 친구의 승진을 제 일처럼 기뻐하고, 친구가 데려온 낯선 이는 아무런 경계 없이 또다른 우리 편이 된다. 화려한 한 때가 저물고 이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정희네에서 모여 함께 망가져 가는 것뿐이지만, 중요한 것은 망가지고 있다는 현실이 아니라 ‘함께’라는 사실이다. 서로를 끌어안고 남극의 겨울 바람을 막아내는 황제펭귄처럼 그들은 서로를 끌어안고 냉혹한 현실을 견딘다. 이들의 사랑은 그렇게나 투박하고 그래서 특별하다. 후계동 사람 누구도 이 특별한 사랑을 시끄럽게 떠들거나 과시하지 않지만, 이들이 서로 건네는 말은 모두 사랑한다는 말로 치환 가능하다. 당신이 “불쌍하다”는 말도, 당신의 “부끄러움이 좋다”는 말도, 당신에게 “익숙하다”는 말도 그들만의 특별한 사랑 고백이다. “사는게 왜 이렇게 치사하냐”고 묻는 동훈의 말에 정희는 “사랑하지 않아서”라고 답한다.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 백만 송이 장미가 피는’ 것처럼,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줄 준비가 되어 있을 때 인생은 화양연화를 맞는다. “누군가를 제대로 좋아할 줄 모르는” 도준영이 가장 화려한 직함을 가졌지만 모두에게 불쌍하다는 소리를 듣는 이유, 관객들의 눈에도 가장 초라해 보이는 이유다.
인간이 무엇인가를 물으며 시작된 드라마는, 조건 없는 숭고한 사랑이 비로소 인간을 만든다고 대답하며 끝난다. 그래서 결국 이 드라마는 판타지다. 이런 세상에 ‘조건 없는 사랑’처럼 희소한 것은 없으니까. 그래서 동훈과 지안은, 그리고 후계동 사람들은 판타지다. 평범한 옷차림과 평범한 동네를 살고 있지만 그들 중 누구 하나 평범한 사람이 없다. 친구가 다치면 이유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함께 싸워줄 어른들, 생전 처음 본 지안에게 기꺼이 침대 곁을 내어주면서도 왜 이곳에 왔는지 이유조차 묻지 않는 정희, 장판 밑에 오만 원을 수놓으며 몇 달을 꿈꿔온 형제들간의 여행을 포기하고 얼굴 한 번 본 소녀의 할머니를 위해 근사한 장례식을 선물하는,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인생에 박아 넣을 가장 기똥찬 순간”이라 부르는 상훈은 현실에 없다. 이런 흔치 않은 사람들만 살아가는 후계동은 우리가 잃어버린 에덴 동산이며, “다시 태어나면 후계동에 태어나고 싶다”는 지안은 오래 전 낙원에서 추방당한 채 그곳을 그리워하는 실향민들, 바로 우리 모두다.
고도를 기다리는 고고와 디디처럼 잃어버린 낙원을 그리워하는 것은 우리의 숙명이다. 그러므로 나는 언제까지나 후계동에 살고 싶을 것이다. 인간에 대한 판타지가 사랑에 대한 판타지처럼 해롭지 않은 이유는 다시 한번 인간을 사랑할 것을 꿈꾸게 하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후계동에 살지 못하는 것은 내가 동훈처럼, 지안처럼 살지 못해서라는 부끄러운 각성, 그래서 다시 한 번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은 인간에게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한 번 더 믿게 만들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판타지는 그래서 언제나 유효하다.
이 완벽한 이야기에 바치는 헌사에 가장 어울리는 마무리는 당연히 후계동 사람들을 위한 건배다. 언젠가 그들을 만나 함께 정희네서 어울릴 그날을 꿈꾸며 외친다, 후계후계 잔을 비후계!
-----------
*아래 유튜브 채널에서 국/영문 오디오북으로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