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어쩌다 번역가, 너는 내 운명

by 달빛그림자

브런치에서 처음 연재한 '어쩌다 번역가' 매거진의 마지막 글이다.

애초에 열한 번째까지 목차만 정해놓았었는데 예상보다 시간은 많이 걸렸지만

어설픈 글이나마 끝까지 완주할 수 있게 되어 참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추석 전에 타이완의 중부 도시인 타이중에 서점투어를 떠났었는데

일곱 권의 책을 골라왔다. 전에는 조금 괜찮아 보이면 이 책 저 책 한 짐

짊어지고 왔는데 이제는 나의 취향인지, 한국 독자들이 좋아할 만한 책인지,

트렌드에 부합하는지, 번역하기에 너무 어렵지는 않은지, 잘 팔리는 장르인지

등을 따져 서점에서 몇 페이지라도 꼼꼼히 읽어본 다음에 책을 선택한다.


출판기획안이란 출판사에 소개하고 싶은 책의 정보를 정리한 기획서로

책의 출판연도라든지 ISBN 번호, 책의 장르, 분량, 출판사 이름 같은 기본 정보는

물론이고 저자와 책의 소개, 목차, 책의 일부 내용을 번역한 발췌 번역, 책의 마케팅

포인트, 역자의 감상 같은 내용이 포함된다. 보통 출판기획안 하나를 쓰려면 짧게는

2, 3일 길게는 일주일 정도가 걸린다. 당연히 번역가마다 작성 기간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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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번역을 하고, 기획안을 쓰고, 그 기획안을 출판사에 발송하고, 답을 기다리고,

선택되면 계약을 하고, 번역을 하는 일이 반복적인 일상이 된 나는 얼핏 보면 백수에 가깝다.

남들처럼 7, 8시에 출근하지도 않고 저녁에 퇴근하지도 않으며 나갈 일이 없으면

딱히 화장도 하지 않는다. 일일이 밥 차려 먹기 어려우니 대낮에 편의점에 가

도시락을 고르고 있으면 어쩐지 단골 편의점 아줌마의 시선이 뒤통수에 꽂히는 것 같다.

그럴 때마다 '나를 할 일 없는 백수로 보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머리를 스친다.

사실 집안 식구들도 집에서 하루 종일 일하는 나를 반쯤 할 일 없는 사람으로 보긴 마찬가지다.

이는 따로 작업실을 두지 않고 집에서 번역하는 번역가라면 누구나 겪었을 일이다.

내가 아는 어떤 번역가는 밥 먹고 살 만큼 번역을 하는데도 아버지께서 툭하면

안정적인 직장을 찾으라는 잔소리를 하신다고 하소연한 적도 있다.


그 뿐이 아니다. 많은 번역가들이 그렇듯 나도 한때는 손가락 근육이 부어

아침에 손이 오무려지지 않거나 책상에 너무 오래 앉아 있어 허리, 고관절 통증에 시달리기도 했다.

요즘도 햇빛을 잘 보지 못해 생긴 심각한 비타민 D 부족으로 각종 비타민제를 챙겨 먹고 있으며

운동과 수면 부족 때문에 피로회복제를 달고 산다. 요 몇 년 사이 번역 일이 바빠지면서

살도 10kg 넘게 쪘는데 하루 종일 앉아만 있는 날이 많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고 책 한 권을 번역하는 일이 만만하고 쉬운 것도 아니다.

300페이지 책을 한 권 번역하려면 평균 한 달 반에서 두 달 정도 걸리는데

밖에 잘 못 나가는 것은 둘째치고 번역에 대한 정신적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니다.

분명 나는 무슨 말인지 알겠는지 우리말로 어떻게 옮겨야 할지 한 문장을 두고

몇 시간씩 낑낑거리기도 하고, 특정한 단어나 문장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

같은 글을 보고 또 보거나 인터넷을 한참 뒤지거나 안 되면 메일을 보내 작가에게 문의하기도 한다.

오죽하면 우리 어머니는 내가 번역할 때마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한다고 하실 정도다. 보통 사람들 생각처럼 번역가라고 글을 보면 술술 번역할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다. 특히나 작가의 뜻을 왜곡하면 안 되기에 한 글자, 한 단어의 선택이 조심스럽다.

그래도 꼭 몇 군데는 오탈자가 나거나 오역이 나게 마련이다. 그럴 경우 매의 눈을 가진 독자가

출판사에 제보하거나 번역자인 내게 직접 SNS나 메일로 알려주기도 한다.


사람들과 부대끼지 않고 편하게 일하고 싶은 시간에 여유롭게 일하니 좋겠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직업이나 저마다의 고충과 힘든 점이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남들보다 나은 어학 실력만 믿고 번역에 환상을 갖는 지망생들에게도 이 말을 해주고 싶다.

'남들이 어떻게 보든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


이 마지막 글조차도 벌써부터 쓰고 싶었지만 진행하고 있던 추리소설 번역 때문에

차일피일 미루다 번역을 끝내자마자 간신히 쓰는 것이다. 나는 이제 다시 미뤄놨던

번역 기획안을 써야 하고 미리 계약한 로맨스 소설 2권을 번역해야 한다.

분명 프리랜서인데 이렇게 여유가 없을 수 있나 싶기도 하고 이렇게 아등바등하는 것에

비하면 수입이 초라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내가 번역, 특히 출판번역을 계속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이유는

서점 매대에 놓인 내 책을 발견할 때의 뿌듯함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물론 작가에게는 그 책이 작가의 책이겠지만 번역가인 내게는 내 책이기도 하다.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거나 고상한 말로 번역을 하는 이유에 대해 말할 수 있겠지만

나는 그렇다. 서점에 놓인 내 책이 어느 독자의 손에 들어가 소중히 읽힐 테고

작가가 풀어놓은 지식과 지혜와 교감하고 공감하며 그 책이 독자의 것이 되지 않겠는가.

나는 그렇게 작가와 독자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다리를 놓고 있는 사람이다.

그것은 커다랗고 화려한 대교가 아니라 작고 볼품 없는 징검다리이겠지만

나는 촘촘하고 단단한 다리를 놓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다.


어쩌다 시작한 번역이지만 이제는 내 운명이 된 번역, 나는 번역가다.

AI가 발달하면 가장 먼저 없어질 직업 중 하나라지만 인간의 정신과 감성이 깃든

번역은 AI가 하는 번역과는 분명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과연 AI가 작가가 행간에 숨겨둔 의미나 기쁨, 한숨까지 읽어내고 번역할 수 있을까?

미래는 어떨지 모르지만 나는 오늘도 내가 맡은 책을 꼼꼼히 번역해 세상에 내놓을 작정이다.

그게 오늘의 번역가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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