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무식한 번역가, 내가 생각하는 좋은 번역

by 달빛그림자

어느덧 열 번째 글이다. 마침 나는 내일 타이완의 타이중으로 날아간다.

지금 소설 한 권을 번역 중이긴 하지만 잠시 짬을 내어 서점투어를 떠난다.

성수기에는 비행기표가 비싼 편이라 상대적으로 가격이 저렴한 5월이나 9월쯤

서점투어를 가곤 한다. 중국이나 타이완, 홍콩으로 2박3일 혹은 3박4일 여행을

가면 2/3 정도의 시간은 이 서점, 저 서점에 박혀 책을 찾는다.


에이전시에서 전해주던 책만 번역하던 몇 년 전을 생각하면 지금처럼 일 년에 한두 번씩

해외에 나가 책을 고르고 있는 내 모습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그보다 더 몇 년 전으로 돌아가 드라마 작가가 되겠다며 아등바등하던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처럼 중한번역가로 일하고 있는 내 모습 역시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우연한 기회로 발을 들였고, 벌이가 신통치 않다고 투덜대면서도 우유부단했기에

지속했던 일인데 지금은 내 운명이 됐다.


아는 번역가들은 많지 않지만 번역일을 2, 3년 하다 보면 자신이 생각하던 번역과는 현실이

달라서, 돈이 안 되서, 일감이 없어서 번역을 그만두는 번역가가 허다하다고 들었다.

그런데 이렇게 10년을 넘게 번역가로 일해왔고, 또 일할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나는 학창 시절 공부도, 운동도, 음악도, 하다 못해 집안일도 잘 못하는 아이였다.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 타고난 재능이 있다는데 나는 도무지 어디에 쓸모가 있는 건지

알 수 없어 속상할 때도 많았다. 사실 지금도 아주 잘 나가는 A급 번역가는 아니다.

좀 더 유명하고 소문난 번역가들은 1, 2년씩 번역 스케줄이 쌓여 있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나는 그런 번역가는 아니다. 경력이 있다보니 먼저 번역 의뢰가 들어오기도 하지만

여전히 번역하고 싶은, 번역할 만한 책을 찾고 기획안을 쓰며 메일을 돌리고 답장을 기다려야

하는 평범한 번역가다. 매달 월급이 따박따박 들어오는 게 아니니 다음 달, 다다음 달 생활비를

걱정하는 일도 흔하다. 그럼에도 12년 동안 30권 넘게 번역을 하며 자연스럽게

좋은 번역이란 무엇인지 고민하고 생각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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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프린트들은 여지껏 내가 번역해온 책들의 프린트본이다. 책을 바로 보거나 PDF 파일을 보며

작업하는 번역가들도 있다지만 나는 좀 아날로그라 일일이 책을 프린트해 모르는 단어를 체크하고,

내용을 파악하며 작업해야 번역이 잘 된다. 낡은 책장과 책상 사이에 쌓여 있는 이 프린트들은

짧게는 1개월, 길게는 3, 4개월에 걸쳐 벌인 지난한 싸움의 흔적이다. 늘 지금 작업하는 책의

첫 번째 독자라는 마음으로 번역하는 나는 가독성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

나는 중국어로 된 책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사람이고, 내가 번역하는 책을 읽는 독자는

대개 한국 사람이다. 그 때문에 독자가 이 책을 얼마나 쉽고 매끄럽게 읽을 수 있을지가

내 최대 관심사다. 독자가 읽었을 때 외국 작가가 썼는지 모를 정도로 막힘 없이 읽을 수 있어야

좋은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번역가가 작가의 글을 이해하는 데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


누군가는 번역을 제2의 창작이라고 하고 나도 한때는 그 말에 동의했지만

오랜 시간 동안 번역을 하다 보니 좋은 번역은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를

또렷이 드러내면서도 문장을 해치지 않고 독자들이 매끄럽게 읽을 수 있어야 함을 깨달았다.

그런 의미에서 번역가는 훌륭한 창작자가 아니라 좋은 전달자이다.

물론 번역을 하다 보면 의역이 옳은지, 직역이 옳은지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도 하고

내 머리로는 이해하는데 딱 맞는 우리말 단어를 찾지 못할 때도 있다.

그럼에도 번역가가 최우선으로 염두에 둬야 할 것은 작가가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와

책을 읽는 독자를 고려한 가독성이다. 이 두 가지만 마음에 새기고 있다면 그것이 의역이든 직역이든

그리 중요하지 않다.


물론 이것은 개인적인 생각이고 번역가마다 입장이 다를 수 있다.

좀 더 디테일하게 말하자면 좋은 번역도 여러 가지 요소로 나눠 말할 수 있겠지만

무식한 번역가가 생각하는 것은 바로 작가와 독자뿐이다.

두구두구, 드디어 내일 타이중으로 간다. 15만 원짜리 비행기 티켓을 들고.

수많은 책들 속에서 내가 번역하고 싶고, 독자들이 좋아할 만한 책들을 고를 수 있을까?

부디 3박4일 중 하루만이라도 운수 좋은 날이 있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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