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는 아닙니다만

by 달빛그림자

오랜만에 친구와 토요일 아침에 만나 조조로

영화 <조커(Joker)>를 봤다. 사실 나는 마블 시리즈

영화는 거의 본 적이 없으며 배트맨에도 큰 관심이 없다.

하지만 배트맨 속 악역 '조커'가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보여주는 영화란 말에 어쩐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삶에서 히어로가 되기를 바라지만

실제는 조커처럼 악역을 자처해야 할 때가 더 많지 않던가.


훗날 조커로 거듭나는 호아킨 피닉스가 연기한 '아서'는

스크린 속에서 기괴하면서도 애처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의 삶은 온통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들 뿐이고

누구도 그를 동정하지 않으며 그의 바람과는 달리

존재감을 거의 드러낼 수 없지만 엄마가 부르는 애칭인

'해피'처럼 그는 강요 받은 억지웃음을 지어야만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빅토르 위고의 소설

"웃는 남자" 속 주인공 귀엔플랜이 떠올랐다. 아마도

조커는 입이 찢어진 채 버려져 평생을 기괴한 웃음을 지으며

살아야 했던 귀엔플랜의 캐릭터를 차용한 인물일 것이다.

귀엔플랜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 위해 거짓 가면을 쓰는

현대인을 대변하는 상징적인 인물로 여겨지기도 한다.


빅토르 위고가 작품 활동을 했던 1800년대에도, 우울한 악당

조커가 인기를 끄는 2000년대에도 사람들은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거짓 웃음을 짓고, 거짓 가면을 써야만 할 때가

많은가 보다. 영화 <조커>는 시종일관 우울하고 잔인하며

숨이 막힐 듯한 긴장감이 느껴지는데 참으로 서글픈 것은

나의 삶도, 우리 누군가의 삶도 그와 그리 다르지 않음에

공감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사람은 누구나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어 한다.

속된 말로 잘난 놈이든 못난 놈이든 이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어필하고 싶어하며 어떤 식으로든 영향력을

끼치고 싶어 한다. 난 어디서도, 어떻게든, 그 어떤 존재감도

드러내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자신의 마음을 잘 모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모래알처럼 많은 사람들이 섞여 사는 세상에서

영웅으로든 악당으로든 존재감을 드러내고 영향력을 끼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평생 큰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한 채 평범히 살다 사라질 것이다.

그런 사람들 중 일부는 현실에 순응하며 살아가고

또 일부는 조커처럼 현실을 거스르며 살아가리라.


예전에 번역한 "인민의 이름으로"란 소설에 보면 작가는

"웃는 남자"와 반대되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소설로

안톤 체호프의 "상자 속에 든 사나이"를 꼽았다.

그 작품 속 주인공 벨리코프는 사람과 사회에 대한 의심으로

갖가지 도구로 자신을 가린 상자 같은 휘장을 친 침대에

누워야만 잠이 들 수 있다. 사람들의 관심에 목말랐던

귀엔플랜과 달리 벨리코프는 세상과 거리를 두기 위해

겹겹의 갑옷으로 자신을 보호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이 두 남자가 서로 다른 사람이었을까?

아마 그들은 조커만큼이나 사람들의 위로가, 세상의 이해가

필요했던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당신과 내가 그러하듯이 말이다.


누군가는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우스갯소리로

존재감을 뿜뿜 뽐내며 살아간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언제, 어느 곳에서, 어떻게 살다 갔는지 눈에 띄는

흔적도 남기지 못한 채 세상과 이별하고 만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 기억하자.

존재감이 약할 수는 있어도 무(無)는 아니라는 걸 말이다.

나는 정의를 수호하는 배트맨 같은 히어로가 될 수도,

측은한 광기를 내뿜는 악당 조커가 될 수도 없겠지만

존재감이 1도 없는 '무'는 아님을 알고 있다.

깍둑썰기 되어 배추김치 옆을 채우는 깍두기가 되면

어떻고, 소고기뭇국의 국물을 내는 네모난 무가 되면 어떠랴.

주연이 아닌 조연이 된다 해도, 그보다 못한 엑스트라가 된다 해도

누구나 존재감이 무일 수는 없다. 나는 거짓 미소를 짓는

귀네플랜이, 세상과 단절된 벨리코프가, 존재감에 목말라 망상에

시달린 조커가 되기보다 나의 가치를 알아주는 곳에서 거기에

어울리는 존재감을 드러내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그 존재감이 1이면 어떻고 2이면 어떠랴.

나는 이 세상에서 미치지 않고 나의 삶을 오롯이 살고 싶다.




이전 11화눈치 보고 살아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