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오랜만에 한 친구를 만났다.
나와는 딱히 공통분모가 없는 친구인데
제법 오랜 세월 만나고 있다.
사실 이 친구와는 중학교 때부터 같은 학교였는지
고등학교 때부터 같은 학교였는지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한 번도 같은 반이 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친구는 내 친한 친구의 친구였고, 세월이 지나고
나이를 먹으며 어영부영 친구란 이름으로 지내게 됐다.
이 친구와 나는 마흔이 넘은 나이에도 비혼이란
아주 커다란 공통점을 빼면 도무지 닮은 데가 한 군데도 없다.
예를 들어 친구는 취미생활로 산을 타거나 와인 모임을 나가고,
심리학 강의를 듣는 등 외향적이고 활동적인 일을
많이 하는 편이고 나는 혼자 집에서 음악을 듣거나 낮잠을 자고
TV를 보며 내향적이고 나 편한 대로 시간을 보내는 편이다.
또한 친구는 남의 일에 관심이 많아 때로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상대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는 편이지만
나는 남의 일을 캐묻는 일에 큰 관심도 없을 뿐더러
이야기를 주도하기 보다는 장단만 맞추며 듣고 있는 편이다.
뿐만 아니라 친구는 꽤 엉뚱한 데가 있어 난 데 없이 전화를 걸어
여행을 가자고 조르기도 한다. 이를테면 자신은 토요일에
여행을 가면서 내게는 월요일에 전화를 걸어 함께 갈 생각이
있느냐고 묻는 식이다. 심지어 이 말이 그냥 하는 농담이 아니라
진지한 제안이란 것이 간혹 나를 당황시킨다.
그에 비해 나는 못 해도 한두 달 전부터 여행 계획을 짤 뿐더러
누구에게 여행을 함께 가자고 얘기하는 일도 거의 없다.
혼자 다니는 여행이 훨씬 편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친구와 함께 도쿄 여행을 간 적이 있었는데
나는 3박4일 일정을 모두 꼼꼼히 짜온 반면
친구는 아무런 계획도 없이 덜렁 왔길래
내가 짠 스케쥴에 따라 움직이다 친구가 보고 싶은 게 있으면
중간에 끼워넣기 식으로 여행을 한 적도 있다.
이처럼 친구와 나는 하나부터 열까지 별로 맞는 게 없다.
무엇보다 나는 언제 직장을 다녔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오랫동안 자유롭게 살았다. 예전에는 한량들(?)이 많은 영화사에
다니며 돈은 없어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았고
지금은 전공과는 전혀 상관없는 중한번역을 하며 살고 있다.
한 마디로 속은 편하지만 돈은 안 되는 일만 하고 살았다.
반면 친구는 직장을 다니다 어느 날 불쑥 이탈리아로 도자기 공부를 하러
다녀오더니 타일 회사에 들어가 아주 오랫동안 한 분야에서 일했다.
십수 년을 타일 쪽에서 일했지만 회사를 옮긴 것도 딱 한 번뿐이었다.
친구는 사람에 부대껴 속은 불편하지만 나름 돈이 되는 일을 하고 산 셈이다.
그런 친구가 얼마 전 회사를 그만둔다고 했다.
몇 달이나 연락없이 살던 친구의 퇴사 소식은 조금 뜻밖이었다.
실제로 친구는 사표를 냈고 회사에서 붙잡았지만 일에 치여
너무 힘들다며 과감히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십 년 가까이 한 회사에서 근무하며 직급도 올라가고,
월급도 안정적으로 받는데다 40대 중반이란 나이의 압박도 있었을 텐데
엉뚱하긴 해도 지극히 현실적인 친구의 프리랜서 선언은 좀 무모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친구와는 여의도의 한 쇼핑몰에서 점심시간에 만났는데
반팔티에 청바지를 입은 나와 달리 점심을 먹으려고
줄을 선 사람들은 대부분 양복이나 격식을 갖춘 옷을 입고 있었다.
새삼 내가 얼마나 평범한 직장인들과는 동떨어진 생활을 해왔는지
실감이 났다. 친구도 피자에 맥주를 곁들여 식사를 하며
한낮에 이런 쇼핑몰에 한가하게 앉아 맥주를 마시는 게 얼마만인지
모른다고 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9시 출근, 6시 퇴근 혹은
야근에 익숙하던 친구가 하루 아침에 달라진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물론 친구는 프리랜서 선언을 했지만 나처럼 하루 종일 집에서
번역하고 밥 먹고 잠자는 일은 없을 것이다. 타일 디자인으로
자신의 사업을 하고 싶다는 계획을 갖고 회사를 그만뒀기 때문이다.
하지만 친구의 하루나 삶이 달라질 것은 너무나도 뻔한 일이다.
늘 보던 동료나 상사가 사라지고, 회사라는 방패막이가 사라지고,
차장이라는 직함이 사라지고, 따박따박 나오던 월급이 사라지고
맨바닥에서 뭐든 새롭게 시작해야 할 테니 말이다.
살다 보면 이렇게 삶의 전환기를 맞게 되는 일이 몇 번쯤 있게 마련이다.
하루하루 비슷하게 흘러가던 일상에 파문이 생기고
전혀 다른 기분, 전혀 다른 생활리듬,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삶을 새롭게 바꿔 살아야 할 때가 오는 것이다.
이런 전환기가 자발적인 것이든 타의에 의한 것이든
우리는 자신이 처한 현실을 똑똑히 마주해야 한다.
물론 갑작스럽게 닥친 변화가 겁이 날 수도 있지만
정신을 바짝 차려야 다음 발걸음을 어디로 내딛어야 할지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변화는 두렵기도 하지만
정말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하지 않던가.
그 변화가 드라마처럼 현란하고 익사익팅한 것이 아니라 해도
우리는 스스로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며
전환기의 변화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가야 한다.
또한 변화에 적응하겠다며 괜히 조바심 내기보다
앞날을 넓고 멀리 보며 여유 있게 계획을 꾸미거나 실천하는 것도 중요하다.
어차피 인생은 단거리 달리기 시합이 아니라 장거리 마라톤이니니까 말이다.
당장 넘어지지 않겠다고 온몸에 힘을 바짝 주고 무리하게
속도를 높일 필요는 없다. 이왕 찾아온 변화라면 충분히 탐색을 하고
자신에게 유리하게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신중히 고심한 뒤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도 결코 늦지 않다.
20년 가까운 직장생활을 하다 그야말로 오랜만의 휴식을
얻게 된 친구가 부디 정신을 바짝 차리되
충분히 여유를 누리며 자신의 새로운 앞날을 설계하고
가볍게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길 바라본다.
"넌 잘할 수 있을 거야. 몇 번 넘어져도 괜찮으니까
네가 가고 싶은 길을 가라, 친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