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속도

by 달빛그림자

선선한 바람이 조금씩 불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가을이 왔다.

더구나 오늘은 낮과 밤의 길이 같아지는 추분이란다.

완연한 가을이란 말인데 금세 추운 겨울이 올 것 같은

예감은 왜일까?


어렸을 때는 우리나라가 분명 사계절이 또렷한 나라였는데

나이를 먹을수록 봄, 가을은 확연히 짧아지고 더웠다 추웠다를

반복하는 여름과 겨울만 남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지구 온난화와 그로 인한 기후의 변화와도 관련이 있겠지만

불과 1, 20년 사이에 빠른 변화가 이루어지는 걸 보면 묘한 기분이 든다.


그렇게 빨리 변하는 것이 어디 날씨뿐이랴.

군대에 간 오빠가 월급을 모아 삐삐를 사준 게 엊그제 같은데

시티폰이 나오고, 2G폰이 나오더니 금세 스마트폰이 나오고,

요즘은 5G폰까지 나오지 않았던가. 내가 처음 본 휴대전화는 홍콩영화 속

벽돌만한 크기의 것이었는데 요즘은 손바닥만한 것도 있고,

오히려 좀 더 커진 것도 있고, 양쪽으로 펼쳐지는 것도 있으니 참 격세지감이다.

게다가 처음 휴대전화를 쓸 때만 해도 이게 뭐 그렇게 쓸모가 있을까 했는데

지금은 컴퓨터보다도 없으면 못 사는 존재가 되지 않았는가.

이제는 일흔, 여든이 넘은 어르신들도 능숙하게 스마트폰을 사용하시는 모습을

보면 정말 세상이 빠르게 변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비단 스마트폰뿐만 아니라 자고 나면 4차 산업혁명이 어쩌고 하면서

AI가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는 시대가 온다고 하니 가장 먼저 사라질지 모른다는

번역가가 직업인 나는 생계의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세상의 변화 속도와는 별도로

사람 개인이 느끼는 인생의 속도란 게 있다.

어떤 사람의 인생은 초고속 열차를 탄 것처럼 쌩하니 가기도 하고

어떤 사람의 인생은 완행열차를 탄 것처럼 터덜터덜 가기도 한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참 느린 아이였다.

말도 느리고, 행동도 느리고, 생각도 느렸다.

누가 뭐라고 이야기하면 "아하!"라고 반응하는

속도도 느렸다. 실제 예를 들자면 대학교 때 나는

국어국문학과에 다녔는데 한번은 한자시험을 본 적이 있다.

한자 자전을 펼쳐놓고 100문제쯤 되는 한자의 훈이나 음을 다는

시험이었는데 그때 나는 D학점을 맞아 재수강을 해야만 했다.

재미있는 건 그날 시험을 보던 나와 날 보던 친구들의 기억이 완전히

상반됐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다급한 마음에 자전 여기저기를 넘기며

손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서둘러 답을 적었으나 끝내 뒷쪽 문제를

다 풀지 못하고 말았다. 반면 내 친구들이 본 나는

시간이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느긋하게 자전을 넘기며

여유롭게 답을 쓰고 있더란다. 내가 끝내 D학점을 받았던 걸 보면

친구들이 본 모습이 지극히 객관적이었으리라.


이렇게 뭐든 늦되서였을까? 내 인생은 아주 느린 속도로 흘러가고 있다.

취직도 대학을 졸업하고 1년이나 지난 뒤에야 할 수 있었고,

중국어도 20대 후반에야 어학연수를 가서 배우게 됐다.

남들이 한창 돈 버는 일에 열중할 때 나는 여전히 꿈을 쫓느라

돈을 모으는 건 고사하고 하루하루 생활하기도 버거웠다.

지금은 아예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없기도 하지만 어쨌든

남들이 다 시집을 간 뒤에도 나는 여전히 비혼으로 남아 있다.

뿐만 아니라 남들이 경제적 안정을 찾아가는 이 시기에

나는 여전히 무주택자일 뿐만 아니라 모은 돈도 별로 없다.

나름 열심히 산다고 살았지만 되지도 않을 꿈에 집중한 후유증이리라.


물론 이렇게 느린 인생을 살다 보니 조바심이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사람들마다 자기 인생의 속도가 다르다고 생각한다.

키가 큰 사람도 있고, 작은 사람도 있듯이

얼굴이 잘생긴 사람도 있고, 못생긴 사람도 있듯이

공부를 많이 한 사람도 있고, 적게 한 사람도 있듯이

그것들이 옳고 그름이나 좋고 나쁨으로 구분할 수 없는 것처럼

인생의 속도가 빠른 사람과 느린 사람도 누가 더 낫다고 말할 수 없지 않겠는가.


물론 빨리 가는 사람은 느리게 가는 사람을 열심히 살지 않는다고

비웃을지 모른다. 또한 빠른 인생을 사는 사람은 실제로 더 치열하고

열심히 살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뭐 어떠랴.

나는 이대로의 속도가 좋은 걸. 좀 더 빨리 달리면 목적지에 먼저

도착할 수도 있겠지만 굳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주변에 뭐가 지나가는지도

모른 채 정신 없이 뛰고 싶지 않다. 나는 천천히 하지만 꾸준히 걷고 또 때론

뛰면서 나만의 속도로 인생을 살아가고 싶다. 그러다 보면 나와 비슷한 속도로

가는 사람을 만나 친구가 될 수도 있고, 나보다 느린 사람을 위해 잠시 걸음을

멈추고 기다려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나보다 빠르게 달려가는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속도에 휘말리지 않고 내 인생의 속도에 맞춰 가다 보면

나도 조금 늦지만 언젠가 내가 원하던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당신 인생의 속도는 얼마인가? 지금의 속도에 만족하는가?

과부하가 걸렸다면 조금 속도를 늦춰보면 어떨까?

중요한 것은 원하는 목적지에 이르는 일이다.

우리는 내 인생의 속도로 살되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 지를 잊지

않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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