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두 학기, 기간으로는 약 10개월 동안 중국에서 공부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기간 동안 효율적으로 중국어를 학습하기 위해
나는 몇 가지 계획을 세웠다. 그 중 큰 계획은 1학기에는 내게 아직 익숙하지 않은
다양하고도 생활성이 강한 중국어, 중국 문화, 중국 사람을 익히고,
2학기에는 어학 시험을 위한 문법이나 작문 등 기술성이 강한 중국어를 공부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나는 1학기에는 한국 학생들과의 접촉을 일부러 피했다.
눈 뜨고 있는 시간에는 중국어만 쓰기 위해 일본, 독일, 남미, 홍콩, 베트남 등 외국 친구들과만 대화했다.
당시 우리 학교에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어학연수를 온 친구들이 많았는데
내가 영어나 다른 언어를 잘하지 못했기 때문에 더듬거리더라도 중국어로만 대화해야 했다.
실제로 처음에는 나도 일본인 룸메이트도 사전을 펼쳐 가며 대화를 이어갈 때가 많았다.
대화라기보다는 단어의 나열 같은 것이었지만... --;
또한 나는 다이어리나 일기를 쓸 때도 되도록이면 중국어로 쓰려고 노력했다.
오죽했으면 나중에 한국에서 친구가 잠깐 놀러왔는데 그 친구 말이
호텔에서 같이 자던 내가 새벽에 혼자 중국어로 잠꼬대를 하더란다.
덕분에 중국에 도착하고 2개월쯤 지나니 귀가 트이기 시작했다.
본래 외국어를 하려면 듣기가 돼야 말하기도 할 수 있지 않던가.
그렇게 매일 읽기, 듣기, 말하기, 쓰기를 반복하니 남들보다 빨리 실력이 늘었다.
특히 매일 같이 계획표를 짜서 공부를 했던 것이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됐다.
이를 테면 나는 매일 새벽에 일어나 CC TV 뉴스 보기, 그날 수업에서 배운 새 단어 정리,
예습, 복습, 당시(唐詩) 300수 매일 한 편씩 베껴 적고 풀이하기, 고사성어책 하루에 5개씩
베껴 쓰고 해석과 단어 정리, TV 드라마나 쇼 프로그램 보며 단어 정리 등을
매일 고정적으로 했고, 그날 그날 했는지 안 했는지를 O, X, △로 표시했다.
바로 이런 식이었다. 해야 될 일들에 A, B, C... 순서를 매기고, 한 것에는 O, 못한 것에는 X, 하다 만 것은
△로 표시했다. 이렇게 한다고 누가 상을 주거나 알아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눈으로 성취를 확인할 수 있어
동기 부여와 결과 확인에 도움이 됐다. 계획을 다 지킨 날은 잠들 때 기분이 뿌듯하다고 해야 하나?
단어를 정리할 때도 나만의 단어장을 만들어 카테고리를 분류했다.
예를 들어 음식요리방법, 주방용품, 음식, 생활용품, 신체 관련된 눈, 코, 입, 손, 발,
문화, 운동, 외국 인명, 지명, 시사용어, 문장부호, 명칭, 기호, 호칭 등으로 카테고리를 나눠
거기에 맞는 단어를 모두 정리했다.
바로 이렇게 '손'이란 카테고리가 있다면 손으로 할 수 있는 모든 동작들을 생각해 단어로 정리했다.
물론 이렇게 정리한다고 다 외울 수 있는 건 아니지만 한 곳에 정리하니 필요할 때마다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연수를 하던 당시에는 '내가 왜 이렇게 공부를 안 할까?' 자책하던 날이 많았지만 지금 돌아보면
1년이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을 제법 알차게 보냈던 것 같다.
1학기가 기초 실력을 다지기 위한 시간이었다면 2학기는 고급 중국어를 배우기 위한 시간이었다.
2학기에는 부담 없이 한국 친구들도 몇 명 사귀었고 좀 더 여유롭게 시간을 보냈지만
본격적으로 어학시험인 HSK(한어수평고시)를 준비하기로 했다.
HSK는 영어로 치면 TOEIC 같은 시험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중국어 좀 공부한다는 사람은
실력 확인 차원이나 학교, 회사 제출용으로 대부분 응시한다.
나는 딱히 어느 회사에 갈 생각은 없었지만 막연히 무슨 자격증이라도 하나 있어야 되지 않나 싶어
HSK 시험을 준비하게 됐다. 그 때문에 2학기의 푸다오 라오스(과외선생)은 이런 방면에 경험이 많은
선생님을 구했다. 그 친구는 우리 학교의 부회장이었는데 한국 학생을 가르쳐본 경험이 많아
문법이나 작문 공부를 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줬다. 이를 테면 이 친구가 일주일에 2개씩 주제를 내주고
내가 작문을 하면 다시 첨삭을 해주는 식이었다.
2학기에는 고급 중국어 문법책을 열심히 팠는데 여러 권을 보기보단 한 권을 잘 골라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반복해서 보고 또 봤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나는 좌뇌가 잘 발달이 안 된 돌머리(?)여서
그런지 아무리 봐도 이해가 안 되는 경우가 많았다. 대신 내게는 언어에 대한 감각이 있는 편이라
감에 의지한 문제 풀이를 많이 했고 답도 얼추 맞는 편이었다.
지금은 HSK가 등급을 매기는 방식이 달라졌지만 당시는 1~11급으로 분류해 6~8급은 중급,
9~11급은 고급에 해당했다. 나는 1학기 때 HSK 시험에 응시해 중급인 7급을 땄었고,
2학기 막바지에 다시 중급과 고급 시험에 따로 응시해 중급 8급과 고급9급을 땄었다.
시험이 하루 차이여서 둘 다 응시할 수 있었는데 길지 않은 연수 기간에 보는 시험이라 욕심을 부려
중급과 고급 모두 도전했었다. 당시 담당 선생님께서도 고급 시험은 중국에서 2, 3년 있던 아이들도
응시하기 힘들다며 응시료가 아깝다고 말리셨었는데 다행히도 9급에 턱걸이 할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중급이나 고급 HSK에 합격했다는 것이 아니라 시험장에 가서 느꼈던 충격이다.
나는 으레 중국어를 공부하는 학생이면 다 HSK를 보는 줄 알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시험장에 도착하니
응시생의 85%는 한국 학생이었고, 10%가 일본 학생, 그 나머지가 서양이나 다른 나라의 학생이었다.
우리는 외국어로 회화를 잘하든 못하든 어떻게든 어학시험에 응시해 자격증을 따려고 아등바등하는데
서양 친구들은 그런 시험에 신경쓰는 법이 없었다. 사실 수업을 들으면 동양 학생보다는
서양 학생들이 월등히 중국어를 잘했는데 가만히 살펴 보니 '내가 말하다 실수를 하면 어쩌나?'를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어차피 외국어이니 틀리면 다시 배우고 수정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편이랄까.
그에 비해 한국 학생이나 일본 학생은 글자를 쓰거나 문법은 훨씬 낫지만 좀처럼 입을 열어 말을 하지 못했다.
'내가 잘 못 말해서 실수하거나 망신을 당하면 어쩌나?'란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서양 친구들은 활용이 가능한 중국어를 배우고,
동양 친구들은 책으로만 익히는 중국어를 배우고 있는 것 같았다.
명색이 외국어인데 한 마디 입도 뻥긋 못할 거라면 배울 이유가 뭐란 말인가?
1년도 채 되지 않는 어학연수 기간에 HSK 고급 자격증을 딴 것은 기쁜 일이었지만
나보다 중국어로 훨씬 말을 잘하는 외국 친구들을 보며 더 이상 어학시험에 연연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어학시험을 준비하고 응시하며 나는 오히려 외국어를 배운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의미를
새롭게 생각하게 됐다.
요즘도 번역 공부를 한다고 하는 지망생들이 무슨 번역 자격증이라도 따야 하는 것 아닌지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면 나는 손사래를 치며 굳이 필요 없는 것들이라고 만류한다.
당신에게 번역을 맡길 누군가는 당신의 자격증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다만 당신의 번역 실력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또한 그런 실력은 무수한 노력과 연습으로 서서히 완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