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번역하는 책은 심리학 관련 서적인데 예전에도
번역 작업을 한 적이 있는 작가의 다른 책이다.
사실 이 작가 책은 다시 번역하지 말아야지
생각했었는데 어느 출판사에서 내가 번역한 책을 보고
번역이 마음에 든다며 연락을 줘서 또 맡게 됐다.
그 작가의 책은 이미 국내에 여러 권 나와 있는데
내가 타이완 서점 가서 골라와 기획안을 써서 소개하고
번역해 출간한 책이 국내에 처음 소개된 책이었다.
다시 말해 그 작가는 이미 타이완에서는 책을 여러 권 낸
작가지만 국내에는 내가 처음 소개했다는 뜻이다.
나도 잘 알고 소개한 것은 아니고, 서점 투어를 갔다 책을
보니 컨셉이 좋아 보여 가져왔었다.
중한번역가인 나는 일 년에 한두 번은 중국이나 타이완,
홍콩 같은 중화권에 가서 서점 투어를 한다. 물론 온라인
서점에서 고를 수도 있는데 직접 서점에 가면 볼 수 있는
책들이 많고 현지에 가야 어떤 책이 트렌드인지 감이
오기도 하는데다 가끔 전혀 뜻밖의 책을 골라 올 때도 있어
사흘 가면 이틀은 서점에 하루 종일 붙어 있어야 하는
서점 투어를 떠나는 것이다.
사실 이렇게 서점 투어를 다닌 것은 몇 년 되지 않았다.
그 전에는 에이전시에 소속되어 말이 프리랜서지 주는 책을
받아 내 취향에 상관 없이 번역을 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독자들이 어떤 책을 좋아할 지를 생각할 뿐만 아니라
내 기호에 맞는 책인가도 고려하는 편이다.
보통 책은 얇으면 200페이지 정도, 중간 책은 250페이지
내외, 두꺼운 책은 3, 400페이지씩 되기도 한다. 번역
기간은 250페이지 정도 되는 책을 빡세게 하면 한 달
정도에 끝낼 수 있다. 흔히 생각하기에 번역하는 사람들은
외국어를 잘하니까 하루에 몇 십 페이지도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어떤 페이지는 내용이
쉬워 10분, 20분 만에 끝나기도 하지만 어떤 페이지는
모르는 단어가 많이 나온다든지, 번역이 애매한 문장을
만난다든지, 책의 심오한 내용을 이해하기 어렵다든지,
작가가 글을 개떡(?) 같이 써놔서 수습이 어렵다든지 하는
다양한 경우의 수로 한 페이지를 한두 시간씩 붙잡고 있을 때도 많다.
그렇다 해도 평균 한 페이지에 한 시간씩 잡고 하루에
열 시간씩 번역하면 하루에 10페이지씩 번역할 것 같지만
그 역시 그렇지 않다. 사람은 번역기가 아니기에 탁 치면
뿅 하고 번역이 나오지도 않고, 잡다한 생각을 하거나
밥을 먹고, 화장실에 간다든지 피곤해 낮잠을 자기도 한다.
가끔 친구를 만날 약속을 잡기도 하고, 번역하고 싶은
다른 책의 기획안을 써야 할 때도 있으며, 괜히 여행 가고
싶다며 가지도 않을 여행의 항공권, 호텔을 검색하거나
이렇게 브런치를 쓰고 있기도 하다.
직장인들이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식사 시간을 빼고
내내 일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지 않은 것처럼
번역가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프리랜서라 누가 일을
강요하는 사람도 없거니와 잔소리를 하거나 매의 눈으로
지켜보는 부장님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러다 보니 나처럼 집에서 일하는 번역가의 하루는
느슨해지기 십상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시나리오나 소설 쓴다고 몇 년씩 시간
보내고 있는 작가들에 비해 정해진 마감이 있기에 정신을
차릴 수 있다. 얼마 전 활동하는 번역가 카페에서 프리랜서
번역가가 되려면 해당어를 전공하거나 외국 유학 경험이
있거나 해당 직무에 종사한 적이 있거나 뭘 어째야 한다고
글을 쓴 회원을 본 적이 있는데 다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꼭 맞는 건 아니라 생각이 들었다. 물론 거기에 댓글을
단 것은 아니고, 소심한 성격대로 혼자 생각만 했다.
아무튼 나만 봐도 중국어 전공자도 아니고, 번역 자격증이
있는 것도 아니며 유학이라기엔 소박하게 10개월 어학연수
다녀온 것이 전부지만 15년 가까이 번역을 하고 있으니
겉으로 보이는 조건은 정말 하고 싶다면 거추장스러운
형식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번역가는 진입 장벽이
높다는 것이 문제인데 일단 번역을 시작한 뒤 롱런을 하려면
다른 조건들이 훨씬 중요하다. 그것은 바로 맡은 일을 끝까지
마치겠다는 책임감과 마감을 지키겠다는 강박증이다.
물론 어학 실력은 어느 정도 밑받침이 되어야 하지만 조금
실력이 모자라도 꾸준히 앉아 마감 기간 안에 번역을
마치겠다는 강박증이있어야 번역을 오래 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어학 실력은 좋지만 해야 할 다른 일들이
많아서, 만나야 할 친구들이 많아서, 책임감이 부족해서
맡은 번역을 제 때 끝내지 못하기도 한다. 이때 최악은
담당자에서 상황이 어떻게 됐다고 말해주지도 않고
잠수(?)를 타는 것이다. 도무지 기간 안에 끝낼 수는 없고,
말을 하기는 겁이 나거나 자존심 상하고 그러니 아예
휴대전화를 끄고 연락을 끊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이럴 경우 피해를 보는 건 번역을 맡긴 곳만이 아니며
결국에는 부메랑처럼 자신에게도 피해가 돌아오게 마련이다.
게다가 작업 하나를 마무리하지 못하고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다음에도 그럴 확률이 높아진다. 도둑질이 한 번이
어렵지 몇 번하면 양심의 가책도 없어지고, 일도 능숙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몇 번이나 잠수를 타며 자신이 맡은
번역을 마무리하지 못하는 번역가는 장담하건대 1, 2년 안에
업계에서 사라지게 되어 있다.
나 역시 성격이 워낙 게으른 편이라 오늘 할 번역을 내일로
미루기도 하는데 성격이 소심하고 자존심이 세서인지
한 번도 번역을 끝마치지 못하거나 마감을 어겨본 적이 없다.
일을 미뤄 고생하다 며칠 밤을 새워 번역을 마친 적도 있다.
물론 지금은 그렇게까지 번역을 미루지는 않는데 대신
강박증처럼 계속 중얼거린다. "하루도 쉬면 안 된다.
몇 페이지라도 꼭 번역을 해야 돼. 오늘 놀면 내일 두 배로
고생한다." 이 말은 농담이 아니라 사실이다.
나는 번역하기에 앞서 늘 계획을 미리 세우는데 평일에
몇 페이지씩 할지, 게을러지는 주말에는 몇 페이지씩 할지,
외부 약속은 몇 번을 잡을지, 돌발적인 변수가 생기면 어떻게
할지 등을 고려해 번역 스케쥴을 정리한다.
이를 테면 사람 만날 날과 쉬는 날도 계획 안에 정해져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이 스케쥴을 되도록이면 어기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데 그러려면 정말 신경을 많이 써야 한다. 또한 이렇게
철저히 계획을 세워도 스케쥴이 어그러지는 날이 등장한다.
물론 이런 변수도 계획을 세울 때 생각하지만 가장 큰 적은
나태해지는 마음이다.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다고 하지 않던가. 조금만 쉬어야지 하다 보면 하루가
통으로 날아가는 날도 며칠은 발생하게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주문을 외우듯
"하루에 몇 페이지라도 해야 돼. 오늘 놀면 내일 고생한다."란
말을 되뇌며 또 머리에 인이 박히도록 생각하는 것이다.
어떨 때는그런 내 모습이 초조함에 시달리는 강박증
환자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제때 번역을
끝낼 수 없다.
뭔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여유로운 프리랜서의 모습은
아니지만 잠수를 타며 자신의 책임을 배신하는 것보다는
백만 배 더 나으리라. 또한 단순히 기간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한 번역을 출판사라면 편집자가, 일반 회사라면
담당자가 손을 많이 보지 않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치로
번역하는 것이 번역가가 지켜야 할 미덕이자 자부심이다.
어떤 번역가들은 대강 의미만 통하면 담당자가 알아서 손을
봐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그러려면 그냥 번역
때려치우라고 말하고 싶다.
내가 이해를 못하면서 남을 이해시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번역 뿐만 아니라 내가 맡은 일이라면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최선, 최상의 상태를 만드는 게 당연한 일 아닐까. 내가
최선을 다 하고도 미처 생각지 못한 실수가 있거나 좋은
아이디어가 있을 때 내 작업물에 반영하거나 수정해야
더 나은 결과가 나올 수 있다. 내가 열심히 안 하면서
남에게 손을 내미는 건 자존심도 없고 책임감도 없는 행동이다.
사실 오늘도 번역을 빡세게 해야 하는 날이다. 어제가
크리스마스다 보니 계획보다 번역을 많이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번역을 통으로 쉬지는 않았으니 참
다행한 일이다. 느슨해지는 정신줄을 꽉 잡고 오늘도
달려야겠다.
"오늘 놀면 내일 고생한다." 강박증에 걸린 것처럼 되뇌다
보면 오늘 할 일을 오늘 마칠 수 있을 것이다. 굳이 내일
일을 오늘 당겨서 할 필요도 없다.
오늘 할 일을 오늘 하면 되는 거다.
내가 맡은 일은 내가 책임지면 되는 거다.
헐거워진 나사 꽉 조이고 다시 움직여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