뫼비우스의 시간 끌기병

by 달빛그림자

이어서 번역할 책이 있어 지금 번역하는 책의 작업을

서두르고 있는데 이제 고지가 보인다. 전체 분량의 5분의 4

정도 했으니 5분의 1만 잘 번역하면 된다. 사실 마감은 1월

20일이지만 바로 이어서 번역할 책이 있어 한 달만에

끝내려고 용을 썼다. 이 책 전의 책도 보름 정도 일찍

끝냈었다. 지금 이 책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 권의

책 번역 작업이 쭉 줄을 서있었던 건데 이상하게 일이 없을

때는 내내 없다가 일이 생기면 한꺼번에 몰려 온다. 어쨌든

덕분에 돈도 벌고 있고 일도 서두르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나름 작업을 서두르고 있는데도 중요한 일을

할 때마다 항상 드는 생각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나는 왜

이렇게 시간을 끌고 있는가?'하는 의문이다. 사실 이 책의

번역을 처음 시작할 때는 12월 20일 경에 작업을 끝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12월 15일이 왔을 때 그것은

불가능하단 걸 깨달았다. 다시 내 마음속 마감 기간을 12월

31일까지로 늦췄다. 그리고 12월 29일 오늘, 31일이 이틀

남은 시점에 번역해야 할 작업량은 책 전체의 5분의 1,

목차로 따지면 11챕터 중 두 챕터가 남아 있다. 이 정도면

사흘 안에 끝낼 수 있지 않을까? 글쎄, 그건 힘들 거 같다.

내 느려빠진 작업 속도를 감안했을 때 4일이면 잘하는 건데

1월 1일은 외가 친척들이 다 모이는 큰 가족 모임이 있어서

시간을 많이 빼야지 싶다. 이 죽일 놈의 단합력~ --;

결국 나는 잘해야 1월 2일쯤 번역을 끝낼 수 있다. 그것도

잘해야! 그럴 수 있다.


나는 타고난 느림보에다 소심이 인에 박힌 사람인데 그나마

책임감과 일을 끝까지 마쳐야 한다는 강박적 생각 덕에 마감

기간을 어기지 않고 오늘날까지 번역가로 먹고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일을 할 때마다 딴짓이 하고 싶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잡생각이나 잡행동이 많아지고, 알 수

없는 피로에 시달리고, 만사가 귀찮아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이건 소위 말하는 '시간 끌기병'인데 중국어로는 '拖延症'

이라고 한다. 흔히 '미루기병'이라고도 한다. 할 일을 자꾸

뒤로 미룬다는 건데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외국에는 이와

관련된 책도 많이 나와 있다. 국내에도 심리학자

제인 B. 부르카와 르노라 위엔이 쓴 <미룸>이란 책과

심리카운슬러 사사키 켄지가 쓴 <미루기병 고치기>란 책이

번역되어 나와 있다. 중국어의 '拖延症'란 단어에도

마지막에 '症(증)'이 붙어 있는 걸 보면 많은 사람들이

이를 병처럼 심각하게 여긴다는 걸 알 수 있다.


보통은 내가 겪는 그런 증세를 '미루기'라고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영 하지 않겠다고 미루는 게 아니고 주어진 시간

운용을 잘 못하는 것이라 '시간을 끈다'란 표현을 쓰고 싶다.

미루기든 시간 끌기든 이름이야 아무려면 어떠랴. 중요한 건

내가 평생 고치고 싶었지만 지금도 고치지 못한 병이란

사실이다. 도대체 뭐 때문인지도 모르겠는데 나는 중요한

일을 할 때면 꼭 시간을 끌었다. 내게 결정장애가 있어서

그런가 싶기도 했지만 자질구레한 일이나 좋아하는 일은

쉽게 잘 정하고 얼른 처리하는 걸 보면 그것도 아니었다.

아니면 단순히 게을러서일까 고민도 했지만 정말

게을렀다면 일 자체를 마무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시간을 끌고 있는 걸까? 원인을 알아야

병도 고칠 게 아닌가.


이놈의 시간 끌기병으로 고민하던 나는 심지어 이와 관련된

중국 책을 국내에 소개하려고 직접 가져온 적도 있는데 그

책에 따르면 완벽주의 성향이 강한 사람일수록 시간을 끄는

버릇이 있다고 한다. 잘하고 싶은 마음과 실수를 하면

안 된다는 불안심리가 겹쳐 당장 할 일을 자꾸 뒤로 미룬다는

것이다. 실상은 시간을 까먹고 있는 행동이지만 속으로는

시간을 좀 더 벌어보고 싶어 하는 것이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지만 책임을 조금이라도 미뤄보고 싶은 것일 수도 있다.

희한한 건 이렇게 시간을 끌다가도 마감이 다가오면 평소와

다른 집중력이 솟아나면서 못해도 2배의 작업량을 해낼 수

있다는 거다. 사실 그래서 더 화딱지가 난다. 차라리 힘에

부치면 어쩔 수 없는 건데 실은 할 수 있는데도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게 들통(?)이 나니 나 자신에게 화딱지가 날

수밖에. 시간을 좀먹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답답한 걸 보면

완벽주의 성향이 있나 싶다가도 돈만 있으면 놀고 먹고 싶은

걸 보면 게으른 거 같기도 하다. 결국 나의 시간 끌기는

처음부터 제대로 잘하고 싶은 마음과 그냥 일하기 싫은

게으른 본능의 결합상품인 듯하다.


세상 사람 모두가 그렇다면 '그래, 어쩔 수 없는 일이지'하며

안심하겠지만 한 자리에서 몇 시간씩 집중해서 공부한다는

학생을 TV에서 보거나 하루에도 3, 4가지 일을 번갈아

꼼꼼히 잘 해내는 주변의 누군가를 보면 반성과 후회가 몰려

오지 않을 수 없다. 가만히 계산해보면 내가 하루에 10시간

책상에 앉아 있어도 진짜로 집중하는 시간은 3, 4시간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마감을 앞두고 집중력이 늘어날 때는

실제로 작업할 수 있는 양이 늘어난다기보다 집중하는

시간이 두 배로 늘어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작업을 한다고 컴퓨터 앞에 앉았을 때 집중력을 조금씩 더

늘리는 것이리라. 오래 앉아 있는 게 아니라 짧은 시간이라도

집중해 그것을 점과 점 사이의 선처럼 연결해나가다 보면

더 긴 시간을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장의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자리를 뜨면

그 앞으로 다시 돌아오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는 게

더 큰 고민이다.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면서도

불안한 낮잠을 기어코 자고마는 나를 보면 오늘도 내가 내

발등을 찍는다는 생각이 든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런

뫼비우스의 띠 같은 시간 끌기 상황이 문제란 걸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떻게 빨리 컴퓨터 앞으로 돌아올지,

또 어떻게 집중력을 높일지는 평생의 숙제지만 많은 사람이

나와 같은 고민을 한다는 사실에 위안을 삼으면서도

나와는 달리 집중력의 달인인 사람들을 닮고자 노력해

보리라.


다음 책을 번역할 때는 좀 더 부지런해진 나를 기대하며

오늘도 정신 차리고 일하자. 그때도 내 발등을 찍고 있다면

아예 시간 끌기병에 관한 책이라도 써야겠다.

마치 굿이라도 하듯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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