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들어오지 않은 것처럼
빈 종이 같은 방의 문을 열었다
들어와 보니 내게 필요한 모든 것
한 줌의 숨, 한 컵의 물, 한 자루 펜은 있는데
막상 나 자신이 없길래 온 방을 헤집어놨다
툭, 발에 무언가 걸려서 내려다봤더니
어제 쓰다 버린 숨 한 줌이 구겨져 있다
꼬깃꼬깃하게 접어 쓰레기통에도 넣다 말았다
조그만 방에 뭐 더 볼 게 있을까
게으른 난 물 한 컵을 마시고 누워버렸다
만사가 귀찮음을 대충 입 닦는 것으로 표현하면서
'그래도 넌 시인이라는 자존심만은
버릴 수가 없나 보지?'
이젠 구겨진 종이까지 마음에 걸리는구나
백지장의 하얀 사면(四面) 안에 내가 있다
둘러보니 나를 숨 쉬게 하는 것
파란 하늘, 하얀 종이, 검은 잉크는 있는데
막상 나는 왜 이곳에서 눈을 감고 있는가
툭, 눈에서 뭔가 떨어져 내려다봤더니
눈치 없는 눈물이 한 방울 옷깃을 적셨다
부비적 지워지진 않으니 얼른 마르기나 하거라
조그만 방에 뭐 더 볼게 남았을까
침대엔 허물뿐인 내가 가지런히 누워 있을 뿐
이제 빈 껍데기의 주인은 가야 할 시간
텅 빈 종이 같은 방의 문을 조용히 닫았다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던 것처럼
Inspired by "Solitude" of Ryuichi sakamo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