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아주심기'하는 계절이 온다면

[영화리뷰] 리틀 포레스트

by Se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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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 끝에 봄이 왔다.
이제 주말 아침엔 따스한 내음이 돈다. 맑은 하늘에 피는 햇빛에 하얀 살을 드러내도 되는 계절이 어느새 왔다.

'봄'(春)'
이름만 들어도 싱그러운 느낌이 드는 마법 같은 한 글자.
말로 하면 초록빛 잎사귀가 씹힐 것 같은 기분 좋은 말.
무거운 눈이불 걷어내고 새롭게 돋아나는 꽃봉오리처럼 나도 두 팔을 벌리고 기지개를 켜며 '다시'라고 내뱉어도 괜찮을 것 같은 계절

'그래, 올해도 봄이 왔다.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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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주를 보내고서 얻은 값진 주말에 임순례 감독님의 '리틀 포레스트'를 보고 싶었던 이유는 뭐였을까.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에 괜시리 이런 의문이 들었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나물반찬 같은 영화를 만들었을거란 감독님에 대한 믿음이었을 수도 있고, 원작인 일본판 리틀 포레스트 두 편의 계절빛 담은 이야기를 좋아해서일 수도 있다. 아니면, 오늘 같은 봄을 닮은 주말에 딱 맞는 영화여서일수도 있고. 무튼, 난 이 영화가 무척 보고 싶었다. 그리고 난 이 영화가 보고팠던 자잘한 이유 중의 하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안에도 역시 '혜원'이와 닮은 부분이 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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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로 상경했던 혜원이(김태리 役)는 아픔을 안고서 겨울날, 두 발로 눈을 밟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이곳이 지긋지긋하다며 겨울날 서울로 향하는 발자국을 남겼던 혜원이는 다시 그 발자국 그대로 밟으며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혜원이가 고등학생이던 시절, 단 둘이 의지하며 살던 엄마(문소리 役)에게 말했다. 달라질 것 없는 삶, 오늘과 내일 똑같이 늘 밥하고 요리하는 삶이 전부인 삶은 싫다고. 그러니까 난 엄마같이 살지 않을거라고. 혜원이는 엄마에게 엄마같이 살지 않을거라고 했고 엄마는 그 말에 씨익 웃어보였다. 그렇게 혜원이를 키우고 요리하는게 삶의 전부여도 만족할 수 있을 것 같던 엄마는, 딸이 수능본 며칠 후 먼저 집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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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면서 한편으론 궁금했다. 왜 혜원이는 아무리 집이라지만 엄마와의 상처가 남아있는 곳으로 굳이 돌아왔을까. 집에 돌아와서도 문득문득 나는 엄마 생각에 괴로워하면서 왜 떠나지 않고 계속 그 집에 머무는걸까? 딸과 엄마의 관계는 참 묘하다. 유달리 둘 사이엔 엉킨 매듭 같은 부분이 있다. 그리고 더 묘한건 그 매듭은 시간이 지나야 풀릴 거라는걸 서로가 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시간의 틈을 준다. 언젠가 그 틈의 빈 자리를 마음으로 이해하여 매듭이 저절로 풀릴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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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매개체, '음식'.
혜원이는 집에서 이 음식 하나하나 직접 해 먹으며 그렇게 하나하나씩 속에서 끄집어낸다. 절대 용서할 수 없을 것 같던 엄마를 끄집어내고, 제대로 마주보기 힘들어 주위만 돌던 나와 마주본다. 그렇게 혜원이는 제자리로 돌아와 다시 '나'를 다지기 시작한다. 영화에서 혜원이가 일 년동안 지낸 후 다시 상경하여 친구들이 혜원이의 양파를 대신 심어줄 적에, 재하(류준열 役)는 말한다. 혜원이는 이제 '아주심기'를 하는 중이라고. '아주심기'란 더이상 심을 곳을 옮겨다니지 않고 완전히 뿌리내리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좁은 고향땅만 알고 지내던 혜원이는 분명 더 넓은 곳, 서울이 자신이 뿌리내려야 할 곳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젊은이 누구나가 그러듯 더 넓고 풍요로운 미지의 곳이 동경할만한 곳이라고 느껴지게 마련이니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꿈꾸던 것과 같지 않다는 것을 배우고 온 혜원이는 이제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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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란 돌을 딛고 더욱 단단해진 혜원이가 스스로 어디에 자신을 '아주심기'를 할 지는 알 수가 없다. 그건 어쩌면 혜원이 스스로도 아직은 모르지 않을까. 어딘가에 뿌리를 내린다는 건 사실 어른에게도 어려운 일이다. 한 곳에 완전히 정착을 한다는 건 다른 선택지를 모두 내려놓는다는 뜻이니까. 그 전에 많은 곳을 돌아보고, 많은 것을 보고 배우며 그 안에서 자신이 원했던 것이 무엇인지 선명해진다면 그 때야 비로소 자신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때 자신을 마주보며 '이제야 널 찾았구나' 라며 흐뭇하게 웃을 수 있을 것이다. 혜원이는 지금도 '아주심기'여정ing 일 것이다. 하지만, 예전보다는 좀 더 자신을 잘 마주보지 않을까 싶다. 그런 혜원이의 여정에, 또 나의 내일에 용기를 담은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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