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직업은 킹메이커입니다."

영화리뷰 <더 와이프(The Wife)>

by Se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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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발표된 매그 울리처 소설의 동명영화화인 영화 <더 와이프>. 소설 속의 조안 그 자체였던 글렌 클로즈의 45년 연기내공을 강렬하게 뽐낸 작품이었던지라 그간의 훌륭한 연기에도 유달리 상복이 없던

글렌에게 세간은 '7번째'의 오스카 노미네이트에서 그녀가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길 간절히 원했다. 골든글로브를 비롯하여 각종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거머쥐며 역시 그녀가 올해만은 오스카를 손에 쥘 것이라 예측했지만 그녀는 정말로 오스카와 연이 없는건지 <더 페이버릿:여왕의 여자>들의 앤 여왕을 연기했던 올리비아 콜맨에게 이번에도 여우주연상을 양보해야 했다. 비록 이번에도 상은 양보해야 했지만 글렌이 연기한 조안을 보았다면 영화 <더 와이프> 의 조안은 어느 누구로도 대체할 수 없다는 것에 모두 동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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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더 와이프> 는 어느밤 걸려오는 한 통의 전화에서 시작된다. 작가인 조셉 캐슬먼에게 걸려온 한 통의 전화는 다름 아닌 스웨덴의 노벨재단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바로 그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었다는 기쁜 소식이었고 조셉과 조안은 침대 위에서 방방 뛰며 노벨문학상 수상을 기뻐했다. 기념파티에서 본인의 수상의 공을 헌신적으로 내조해 준 아내에게 돌릴 때까지만 해도 그저 달달한 노년의 부부라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스웨덴에서 자신의 코트를 들고 있게 하는 남편의 뒷모습을 애처롭게 바라보는 조안의 눈동자를 볼 때까진 말이다. 아마도 이 눈동자는 조셉이 뒤돌아보지 않는 이상 절대 알 수 없는 눈빛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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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극적인 긴장감은 전기작가인 나다니엘의 출현부터 시작된다. 평소 외도를 일삼았던 조셉이 노벨상을 수상하러 와서도 전속사진작가인 어린 여자에 추파를 던지는 걸 본 후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조안에 나다니엘은 함께 술 한 잔 할 것을 제안한다. 이 영화에서 나다니엘은 단순히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조셉의 전기를 쓰고자 매달리는 인물로만 그려지지 않는다. 나다니엘은 두 사람 사이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인물이자 이 비밀을 폭로할 수 있는 핵심적인 인물이다. 즉, 자신을 뒤로 숨기고 남편과 두 자녀에 헌신적인 아내인 조안이 스스로 입을 여는 드라마틱한 전개는 누가 봐도 그려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기폭제 역할을 하는 나다니엘이 오랜 세월 그 모든 비밀을 품고 있으면서도 참아온 조안의 속을 건드리며 이야기는 조금씩 극적으로 흘러가게 되고 비밀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바로, 훌륭하다 칭송받아온 조셉의 모든 책들이 실은 다 조안의 손에서 씌여졌다는 것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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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교수와 학생사이로 만난 조셉과 조안. 당시 대학신문에도 글을 기고할 정도로 재능있는 학생이였던 조안은 자신의 재능을 알아주는 조셉을 마음에 두고 있었고 당시 유부남이었던 조셉과 곧 연인관계를 맺으며 한편으론 작가가 되리란 꿈을 계속 키워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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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날 조셉의 소개로 한 여성작가를 만나게 된 조안은 그녀의 작품을 칭찬하며 그녀 앞에서 자신의 글에 대한 사랑을 내비치고 그녀에게서 뜻밖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전 글 쓰는 걸 좋아해요. 이는 내 삶이에요."

"그러지 마요. 남자들은 여성작가의 글에 관심도 주지 않고 결국 아무도 읽지

않게 될테니."

여성의 경제활동에 각박했던 과거의 시대상에 작가의 세계도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책을 출판해주는 출판사의 임원도, 잡지사의 편집자와 임원도, 리뷰를 쓰는 글쟁이들도 대부분이 모두 남자인 세계에서 여성작가들은 별반 설 자리가 없다는 게 현실이었다. 그리고 글을 삶처럼 여기는 조안에게 이는 받아들이기에 너무 가혹한 현실이었지만 받아들여야 했으며, 곧 함께 부부생활을 하게 된 조셉이 작가로써 별반 진전을 보이지 못하고 괴로워하자 조안은 그녀의 재능으로 둘을 지키기로 나선다. 그녀가 글을 대신 써 주기로 한 것이다. 물론 자신의 이름은 뒤에 숨긴 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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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는 걸 그만둔 것을 후회하지 않냐는 나다니엘의 질문에 조안은 여성작가로서 성취할 것이 아주 조금 뿐이라는 걸 알았기에 그만둘 수 밖에 없었다고 대답했다. 자신의 글은 그만두고 자신의 재능을 타인의 글에 쏟아내고 남자의 이름을 빌려 세상에 낸 후 그녀가 받아야 할 마땅한 모든 공이 타인의 손에 쥐어지는 것을 지켜보는 심정은 매우 참담했을 것이다. 연회장에서 만난 사람이 자신에게 직업이 무엇이냐고 물어도 그녀는 그저 '킹메이커'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그녀는 '킹메이커'가 아니라 '킹'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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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더는 못 해

난 더는 이 수모를 참을 수 없어

당신의 코트를 들어주고 있는 것도, 약을 챙겨주는 것도 더는 못 해

당신이 남들에게 '내 아내는 글을 쓰지 않아요'라고 떠들고 있는데 말야

당신의 아내는 방금 노벨상을 수상했다고!"

결국 몇 십년간 참아오며 그저 남편의 그림자로만 살아와야 했던 시간에서 벗어나 남편을 떠나고 그녀의 길을 가기로 한 조안. 결국 남편은 두 사람의 언쟁 후 갑작스레 심장마비를 일으켜 조안의 눈 앞에서 숨을 거두는 걸로 끝을 맺는다. 그동안 모든 사람들을 속여온 죗값과 무분별한 외도를 저지른 댓가를 치르는 셈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녀의 모든 시간과 사랑을 쏟아부은 한 남자가 눈 앞에서 사라져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조안의 얼굴에서 나타나는 허탈함은 말로 다 하지 못할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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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이 끝나고 돌아가는 비행기 안, 조안은 나다니엘에게 남편의 전기를 써도 좋다고 허락하고 아들에겐 집으로 돌아가 모든 것을 다 말해주겠노라 말한다. 그리고 가만히 노트를 꺼내 새로운 페이지를 펴고서 손가락으로 쓰다듬는다. 조안은 그동안 무수히 많은 글을 썼다. 무수히 많은 글들을 고치고 또 고치며 썼다. 하지만, 동시에 아무 것도 쓰지 않은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것은 진정한 그녀의 글이 아니었을테니 말이다. 이제 그녀는 누군가의 뒤에 서는 것 없이, 누군가의 그림자로 사는 것 없이, 자랑스레 그녀의 이름을 내걸고 그녀의 이야기를 하얀 페이지 위에 써내려 갈 것이다. 어느 누구도 대신 쓸 수 없는, 그녀의 가슴 속에만 있는 그녀의 이야기를 말이다. 영화 <더 와이프>는 진짜 재능을 가진 사람이 자신이라는 비밀을 아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라고 본 영화의 각색가는 말했다. 이제 조안 그녀가 진정한 그녀의 재능을 세상에 펼칠 차례이다. 그리고 나는 진심으로 그녀의 이야기가 듣고 싶다.



(아래는 제가 직접 제작한 영화<더 와이프> 관련 영상입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봐주세요 :)

https://youtu.be/gSkfk41b6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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