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시간

'나'란 심연에 '물이 들다'

by Sehy


깊은 밤, 하나의 세계를
표현하려는 나의 욕구가
내게 펜을 쥐어주고
의자에 앉혔다

삽으로 샘이 솟는 땅의
흙더미를 파내듯
펜은 열심히 가슴속을
파내어 저 아래로 내려간다

펜촉이 내 가슴을 훑는다
나의 속내를 읽을 셈이냐
펜촉이 내 가슴을 긁는다
밑바닥까지 들여올 셈이냐

삽으로 샘이 솟는 땅의
물줄기를 찾듯
펜은 열심히 하얀 종이 위를
제 세상인 듯 가로지른다

펜촉이 내 가슴을 파고든다
네 속내를 내게 들려주련
펜촉이 내 가슴을 도려낸다
네 바닥을 내게 보여주련

삶이 마침내 제 땅을 찾은 듯
펜이 기어코 내 가슴을 뚫고
제 잉크로 내 피를 물들이며
제 세상으로 만든다

‘두려워하지 마,
너를 도려낸 만큼
너를 드러내면
너도 편해질 거야’

가슴 밑바닥에서 울려 퍼지는 말이
깊은 밤을 흔든다

‘그래, 네가 눈을 떴구나
기어코 네가 깨어났구나’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어
봐, 내 눈을 들여다봐
아무도 날 속이며 살 순 없어’

깊은 밤, 한 사람의 세계가
마침내 심연에 닿은 깊은 시간
생의 한 페이지가 넘어가는 소리가
그의 몸 안에서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