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 들다

내 두 손에 세월의 잉크가 묻을 때

by Sehy


고요함이 지붕을 덮은 밤,

고독함에 잠들지 못한 난

그럼에도 살아보겠다고

생의 표식으로 펜을 들었다


사르트르가 생을 걸고 쓴

검의 끝은 날카로웠다

나의 밤을 걸고 휘두르는

검의 끝은 얼마나 날이 섰는가


모든 소설에는 앞머리가 있다

나의 인생이 책 한 권이면

내 삶은 아직 프롤로그인데

왜 난 삶이 권태로울까


아직 쓰이지 않은 깨끗한 인생이

낡은 책상 위에 하얗게 빛난다

앞날을 모른 채 때 묻지 않은

웃음을 띤 넌 이 밤을 밝히는구나


난 그동안 얇은 페이지들의

름한 주인공을 연기했다

넌 그것을 다 보았느냐

논평은 네 품속에 넣어두거라


하얀 종이에 비뚤비뚤하게 써 내려간

나의 인생을 놀리지 말아 다오

내 나름대로 수놓아 쓴 글이기에

미워도 내 글, 아파도 내 글이다


한 글자씩 고요 힘을 줘 눌러쓰다

내 두 손엔 세월의 잉크가 묻었다

종이에 문지르면 번져간 갈 뿐

지나온 흔적은 두 손을 물들였다


때로는 찢고 때로는 구기며 살았다

내 두 손으로 쓴 것을 스스로 구겼다

하지만 인생은 구겨져도 인생이라

여전히 넌 손안에 남아 있구나


고요함이 낙수처럼 퍼지는 밤,

부끄러움에 손을 씻으려던 난

물보다 진하게 손에 묻은 잉크에

서서히 물들어가게 내버려 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