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거리에 멈춰 서서 사진을 찍곤 한다.
그날 그 시각, 그 순간의 기분을 잊고 싶지 않아서다.
붙잡으려 애써도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가는 공기처럼, 어떤 감정은 붙들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금세 사라진다. 눈도 그렇다. 잠시 형태를 드러내며 내려앉았다가도 이내 녹아버리고 만다. 잊는다는 건 대체로 그런 찰나를 닮아 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을 느끼는 날이 있다.
그럴 때면 나는 현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화 속 한 장면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늘 보던 풍경이 몹시 낯설게 다가오는 순간이 그렇다.
좋아하는 거리가 있다. 종로2가와 광화문이다. 지겹도록 걸어도 이상하게 늘 좋다.
오랜만에 그곳들을 다시 걸었다. 똑같은 듯하면서도 군데군데 달라져 있었다. 낯설긴 해도 나쁘지 않았다. 고작 한 달 남짓 지나지 않았을 뿐인데, 그사이에도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얼음이 든 차가운 커피를, 얼음장처럼 차갑고 붉어진 손으로 들고 거리를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지겹도록 눈을 본 탓인지, 몇 해 전부터는 그저 대중교통을 방해하는 성가신 날씨라고만 여겨왔다. 그런데 그날은 원망보다 신기함이 먼저였다.
느리게 내리는 눈은 시간을 멈춘 듯한 풍경을 만들었다. 어느새 나는 미운 줄도 모르고, 눈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우뚝 서서 한참을 바라보고 있었다. 영화 같았다.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마치 ‘봄날은 간다’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탁해진 하늘, 회색 아스팔트, 검은 차와 흰 차들. 도시는 잿빛 풍경의 영화가 되어 있었다.
눈의 속도는 이상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느렸고, 아무 생각 없이 걷고 있으면 아주 빠르게 내렸다.
비와 눈을 맞으면 안 된다고 했던 코트와 가방을 그대로 걸친 채 묵묵히 걷고 있는데, 어느 순간부터 눈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이게 비였다면 틀림없이 폭우였을 것이다. 느리게 내리던 눈은 바람을 만나더니 이내 눈보라가 되었다. 내 키를 훌쩍 넘는 머리 위의 세계에서는 무언가가 소용돌이치고 있는 것 같았고, 그 와중에도 눈은 쉬지 않고 내려앉았다.
땅에 닿은 눈은 녹아 사라졌고, 내게 닿은 눈은 잠시 형태를 유지했다. 내가 털어낼 때까지 소복이 쌓일 듯한 얼굴로.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기억은 눈과 닮아 있다고. 제대로 새겨두지 않으면 잠시 형태를 유지하다가도 곧 녹아 사라진다. 기분도 느낌도 대개 그랬다.
수없이 쏟아지는 눈송이 중 끝내 살아남는 것이 몇 개뿐인 것처럼, 수많은 시간을 지나고도 남는 기억 역시 몇 순간뿐이다.
언젠가 그런 말을 본 적이 있다. 사람은 결국 가장 강렬한 것을 기억한다고. 좋든 싫든, 오래 남는 것은 대개 그런 순간들이다. 어쩌면 그 몇 가지가 끝내 녹지 않은 눈송이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눈의 입자는 묘하게 아름답다. 내 안에 남아 있는 몇 가지 기억도 그렇다. 소중한 얼굴들을 떠올리게 하는 한 줌의 기억과, 어떤 따뜻함을 다시 데려오는 순간들. 그것들은 눈송이처럼 작고 가볍지만 이상하리만치 오래 남는다.
소중한 얼굴들은 가끔 내 마음을 아프게 하기도 한다. 그런데도 사랑하는 것을 멈출 수 없는 얼굴들이다. 따뜻했던 순간들 역시 기쁜 날만으로 이루어져 있지는 않다. 슬픔까지 함께 포함하고 있어서, 오히려 더 오래 남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보며, 오랜만에 그런 생각들을 오래 이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