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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진 Sep 12. 2022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제냐

지속가능한 성장의 발자취

사회 초년생 시절 항상 지나던 소공동 양복점 진열 공간에 눈에 띄던 멋진 수트가 있었다. 지구의 중력을 온 몸으로 받아내는 듯 매끈하게 아래로 딱 떨어진 그 수트 아래 작게 '제냐(Zegna)' 라는 원단으로 만들었다는 소개말을 보고 양복점에 들어가 얼마인지 물어봤던 기억이 있다. 당시 백만원이 넘는 가격임을 알고 나중에 아버지 한 벌 맞춰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해창 양복점이 있던 소공동의 이미지는 나에게 어른들의 공간 같았고, 자연스레 제냐 역시 중장년층 맞춤 정장에 사용하는 고급원단 브랜드로 인식하였다.


'ZGN' 에르메네질도 제냐의 종목코드(Ticker)다. 작년 겨울 제냐가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을 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때마침 연말 모임 약속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그랜드 하얏트 호텔 지하에서 우연히 발견한 제냐의 부띠끄. 그날 내 생각과 완전 다른 세련된 제냐를 경험하였다.


'왜' 제냐는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하였을까? 궁극적으로 제냐는 무엇이 되고 싶은 걸까? 제냐의 스토리를 따라가보자.


□ From sheep to shop


제냐그룹은 1910년 이탈리아 북부 트리베로에서 아버지가 경영하던 원단 공장을 물려받은 에르메네질도 제냐(Ermenegildo Zegna)에 의해 설립되었다. 최고급 원단 제조판매를 하던 제냐는 50년 원단생산 노하우를 바탕으로 1960년대부터 남성복 시장에 진출한다. 제냐는 그들의 장인정신이 스며든 직물 공급망을 'Luxury Textile Laboratory Platform' 이라 부르는데, 이 플랫폼을 통해 제냐는 지금도 구찌, 프라다, 샤넬, 크리스찬 디올 및 톰포드 등 브랜드에게 고급 소재를 공급하고 있다.  


제냐그룹의 창업자 에르메네질도 제냐는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의 비엘라 알프스(Biella Alps)에 있는 회사 직물 공장을 둘러싼 산비탈 주변 약 3천만평 부지에 여러 해에 걸쳐 50만 그루의 나무, 진달래, 수국 등을 심고 지속적으로 가꾸었다. 그렇게 오늘날 뉴욕 센트럴 파크의 30배가 되는 오아시 제냐(Oasi Zegna)로 알려진 자연보호구역 내 공원을 조성하였다.


Source: Oasi Zegna, Zegna


제냐 그룹 캠페인인 'Our Road'는 진짜 '길' 이자, 미래의 로드맵이기도 하다. 실제 제냐는 도로를 건설하였다. 이탈리아에 파노라미카 제냐(Zegna Panoramic), SP232 라고 알려진 약 26km의 길을 만들어 지역 마을과 주위 자연경관을 연결시켰다. 이를 통해 지역 커뮤니티를 조성하였고 일반인들이 찾아와 자연을 경험할 수 있는 환경을 지금까지 구축해오고 있다. 파노라미카 제냐를 통해 오아시 제냐로 하이킹도 가능하고 오아시 제냐에서는 산림욕과 스키 등을 즐길 수 있다. 오아시 제냐에서는 제냐의 SS21 쇼가 열리기도 했다.



원재료 수급부터 제품 생산과정을 브랜드 내에서 철저히 관리하는 수직 통합(Vertical Integration) 체계를 고수해온 덕분에, 자연스럽게 지역사회와 관계, 의사소통을 중시하는 기업문화가 형성된 것 같다. 2014년 호주 아미데일의 아칠(Achill)농장을 인수를 함으로써 호주에서 생산한 최고급 울을 이탈리아로 가져와 원단을 생산하고 있다. 이렇게 그들이 주장하는 'From sheep to shop' 체계를 견고히 하였다. 제냐는 호주산 메리노울 뿐만 아니라, 내몽고산 캐시미어, 아프리카산 모헤어, 인도산 파시미나 캐시미어, 페루산 비쿠나 등 전세계에 있는 최상급 원재료만을 사용한다. 또한 양털 농장뿐만 아니라 수십년 동안 이탈리아의 크고 작은 방직공장을 인수해왔다. 작년 프라다와 함께 이탈리아 캐시미어 생산기업을 공동 인수하였는데, 이렇게 최근까지 공급망 강화에 역량을 집중하면서 제냐의 브랜드 정체성은 원단에서 시작한다는 메시지를 111년째 시장에 던지고 있다.


□ From textile to lifestyle


"제냐는 새로운 아이디어 모두와 경쟁합니다. 고객이 앞으로 마주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요. 예컨대, 라이프 스타일이라는 측면에서는 크루즈와 같은 여행 상품이 경쟁 상대가 될 것이고, 명품이라는 측면에선 고급 자동차 브랜드와도 경쟁할 것이고, 취향의 측면에선 그림과 같은 예술 작품과도 경쟁합니다. (중략) 어떤 업계든 경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고객과 마주하는 시간이 될 겁니다. '고객의 시간'을 얼마나 소유하느냐가 브랜드의 성패를 가를 겁니다."

질도 제냐/CEO, 프리미엄 조선 인터뷰 2015.01


제냐는 이제 '제냐그룹'으로 바라봐야 한다. 제냐 그룹 내 고급 남성복을 판매하는 브랜드 제냐, 서브 브랜드로 젊은 남성고객을 타겟하는 지제냐(Z Zegna), 럭셔리와 스트리트 웨어를 결합한 제냐 XXX 가 있고, 여성 및 키즈 라인은 2018년 인수한 톰브라운을 통해 공급한다. 제냐그룹 제품은 전 세계 80개국 500여개 매장을 통해 판매되며, 2022.1Q. 기준 직영 매장 295개 (제냐 244개, 톰 브라운 51개)를 보유 중이다. 제냐 패션의 고유 이미지였던 고급 수트를 넘어 2021년 실적을 견인한 중요한 카테고리가 니트, 스포츠 웨어, XXX스니커즈다.


제냐는 최근 매장 네트워크, IT, 디지털 및 생산 영역에 투자를 해왔는데 그 규모는 2020년 약 520억원, 2021년 약 640억원이고, 2022년은 약 1,000억원 수준으로 계획하고 있다. 의류산업 밸류체인 앞단인 원재료 공급망에 대한 강점을 바탕으로, 뒷단인 판매유통 역량 강화를 통해 제냐의 고객 접점을 견고히 하겠다는 전략이다.


제냐그룹은 제냐, 지제냐, 제냐XXX 및 톰 브라운을 통해 브랜드 고객범위를 확대하였고, 이제 라이프스타일 분야로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한 예로 최근 스위스의 자이(ZAI)스키, 이탈리아의 KASK 헬멧, 스위스의 지그(SIGG)물병, 이탈리아의 아웃도어 신발 브랜드 라 스포르티바와 ‘Beyond boundaries’ 라는 아웃도어 캡슐을 기획하였다. 제냐그룹의 CEO인 질도 제냐의 인터뷰와 같이 제냐는 라이프스타일 기업으로 고객과 마주하는 시간을 늘려 나가려 한다.


Source: Beyond boundaries, Zegna


리브랜딩 (Rebranding)


제냐는 21년 12월 IPO 전 회사 전체에 큰 변화를 주었다. 첫 번째로 로고 변경이다. 21년 12월 3일 새로운 컬렉션과 함께 공개한 비쿠나 색의 로드(Road) 심볼은 제냐가 만든 SP232 도로를 연상시킨다. 그리고 제냐의 브랜드 캠페인인 'Our road to tomorrow' 와 연결된다.


Source: nssmag.com


두번째로, 브랜드명 변경이다. 기존 창업자의 이름 에르메네질도를 빼고 성만 남긴 제냐로 시그니처 남성복 브랜드명을 변경하면서 글꼴도 바꿨다. 현대적 느낌으로의 로고 변경은 최근 매장 네트워크와 디지털에 대한 투자를 단행하며 고객의 스펙트럼을 넓히고자 하는 움직임의 일환으로 생각한다.


Source: Our Road, Zegna


질도 제냐는 뉴욕 증권거래소 상장을 제조라인을 더욱 견고히 하는 기회이자, 규모(Scale)의 확장임을 언급하였다. 제냐는 2018년 톰브라운 인수를 시작으로 기존 제냐의 고객 대비 젊은 고객층을 확보하였고, 아동복 카테고리로 확장을 통해 아시아 시장에서 강력한 입지를 다지고 있다. 이런 행보와 자연스럽게 연결을 시키면, 상장이후 이탈리아 내 방직 공장을 인수하여 원단 제조 거점을 늘리는 것과, 추가 브랜드 인수를 예상해볼 수 있겠다.


제냐의 뉴욕 증권거래소 상장


제냐는 2021년 12월 기업인수목적회사(SPAC)와 합병을 통해 뉴욕 증권거래소에 상장하였다. 이번 상장을 통해 제냐는 약 9,700억원의 자금 모집에 성공하였다. 제냐 가문은 약 66%의 지분을 유지하였다. 기업가치(EV, Enterprise value)는 3.1억 달러, 현재 시가 총액은 약 23억달러 (약 2조 9천억원) 수준이다. 제냐의 상장을 주도한 인베스트인더스트리얼(Investindustrial)은 1990년 설립된 유럽계 사모펀드다. 이번 IPO에서 11%의 지분을 확보하였고, 운용 중인 펀드규모는 약 15조원 수준이다. 영국의 자동차 제조사 애스턴 마틴 및 모건, 이탈리아 프리미엄 스파 브랜드 자쿠지, 제냐 등을 포트폴리오로 보유하고 있다. 제냐 같은 소비재뿐만 아니라 헬스케어, 산업재 및 테크기업까지 다양한 섹터에 투자를 하고 있다.


나는 제냐의 소개 영상 중 ‘From textile to lifestyle’ 부분이 제일 공감이 갔다. 명품 브랜드와 스트리트 패션 브랜드와 협업은 이제 흔하게 볼 수 있다. 하지만 제냐는 ‘Beyond boundaries‘아웃도어 캡슐에서 볼 수 있듯 라이프스타일 브랜드와 협업을 시작하였으며, 뉴욕 증권거래소 상장은 적극적으로 우리의 일상으로 스며 들겠다는 일종의 '선언'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브랜드 강도의 재무적 표현은 가격(P)의 하방경직성이다. 가격의 하방경직성을 바탕으로 한 Q(수량, 카테고리)의 확장은 미래 현금흐름의 지속성에 대한 시장의 신뢰를 수반한다. 이런 시장의 신뢰는 낮은 할인율로 이어지며, 기업가치는 상승한다. 즉, 브랜드와 재무는 동떨어진 개념이 아니다. 내가 선택한 지속가능성에 대한 시장의 신뢰가 형성되면 반드시 기업가치로 귀결된다.


제냐는 지난 111년간 원재료부터 제품 생산과정을 브랜드 내에서 철저히 관리하는 수직 통합체계를 구축하였고, 최근 판매(D2C, 디지털 등)채널에 대한 투자를 늘려가고 있다. 이렇게 원단 기획 및 제조 플랫폼을 중심으로 라이프스타일 전반으로 카테고리를 확장 중이다. 이들은 내가 주목하는 기존 밸류체인의 혁신을 통해 End-User의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Value Chain Disruptor'에 해당되는 브랜드라고 생각한다.






원고를 마치고 평소 친하게 지내는 테일러샵을 방문하였다. 제냐 원단을 꺼내 천천히 손끝으로 정성스럽게 촉감을 느껴봤다. 이 오묘한 느낌을 이제 니트로, 스포츠웨어로 만나볼 수 있는 미래를 상상해봤다. 제냐는 변화의 속도가 빠른 브랜드는 아니었지만, 결과는 확실했던 지금까지의 제냐, 그리고 앞으로도 지금 같은 제냐 일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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