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는 준비됐다, 이제는 산업이 설계돼야 할 때

창의성 중심 산업 생태계로의 전환을 위하여

by 정진

지난주 뉴욕을 방문한 길에 Nolita에 위치한 Aimé Leon Dore(ALD)의 플래그십 스토어를 찾았다. 빈티지 농구공, 나스(Nas)의 "Illmatic" 앨범 자켓, 카페 레온 도르(Café Leon Dore)의 그리스식 페이스트리와 프레도 에스프레소. 이 작은 매장은 단순한 의류 판매 공간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관이자 문화적 성지로 기능하고 있었다.


ALD_뉴욕.jpg 뉴욕 Nolita에 위치한 Aimé Leon Dore 플래그십 스토어, 출처: ALD


ALD는 2014년 뉴욕 퀸즈 출신의 그리스계 이민 2세, 테디 샌티스(Teddy Santis)에 의해 설립된 브랜드다. 그의 문화적 뿌리인 뉴욕 힙합과 그리스 전통, 그리고 스트리트웨어와 클래식 테일러링의 조화는 ALD만의 독자적인 브랜드 세계를 만들었다. “Streetwear for grown-ups”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다. 힙합을 사랑하던 20대가 30대, 40대가 되어도 계속 입고 싶은 옷. 그게 ALD가 설계한 감성의 정체다.


ALD는 이미 브랜드 차원에서 증명된 브랜드다. 세계적으로 히트한 New Balance 협업 스니커즈, Drake's나 Timberland, Porsche와의 콜라보레이션, 그리고 2022년 LVMH의 지분 투자 및 팬데믹 이후 도매 유통망을 과감히 줄이고 D2C(Direct-to-Consumer) 구조로 전환한 후, 뉴욕과 런던의 플래그십 스토어를 중심으로 브랜드의 세계관을 오프라인 공간으로 확장했다. 이 매장들은 단순한 리테일이 아니라, 문화적 공감대와 정체성을 소비자에게 전하는 플랫폼 역할을 한다.


ALD 카페.jpg ALD 플래그십 매장 안에 있는 Café Leon Dore, 출처: ALD


테디 샌티스는 브랜드의 정체성과 감성을 뚜렷하게 구축하면서도, 정교한 드롭 마케팅 전략과 희소성 기반한 유통 정책을 병행했다. 동시에 LVMH의 투자를 통해 브랜드는 글로벌 럭셔리 시장으로의 진입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중요한 점은 LVMH가 ALD의 크리에이티브를 통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자본, 네트워크, 유통 전략, 경영 멘토링 등 브랜드가 자율성을 지키며 스케일업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는 점에서 행동주의 파트너쉽 투자의 사례라 할 수 있다.


이쯤에서 우리 산업을 되돌아본다. 지금 한국에도 충분히 매력적인 브랜드들이 자라고 있다. 창의성도 있고, 문화적 맥락도 있으며, 로컬 팬덤도 생기고 있다. 하지만 ALD처럼 지속적으로 스케일업하며 글로벌 무대에서 브랜드 세계관을 확장한 사례는 많지 않다. 왜일까?


나는 이 지점에서 "브랜드가 부족한 게 아니라, 브랜드가 자랄 수 있는 구조가 부족한 것"이라 말하고 싶다. ALD가 LVMH의 투자를 통해 더 멀리 뛸 수 있었던 이유는, 자본이 단지 돈만 준 게 아니라 창작자가 가장 창의적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국에서도 이러한 사례가 가능하려면, 산업적 구조 설계가 바뀌어야 한다. 그 핵심은 다음과 같다.


자본의 역할은 창작자가 빛날 수 있는 무대를 만드는 것

브랜드에 투자하는 자본은 간섭자가 아니라 디자이너의 조력자여야 한다. 수익만을 목적으로 경영권을 요구하거나 브랜드의 본질을 훼손하는 방식이 아니라, 브랜드 철학과 창의성을 지키면서도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시스템을 함께 설계하는 파트너십 모델이 필요하다. 자본은 브랜드가 가격 방어력을 지키며 제품군을 확장하고, 유통 구조를 정교화할 수 있도록 재정적 안정성을 제공하고, 전문가 인력을 연계하며, 장기적 비전을 도와주는 무대 설계자로 기능해야 한다.


대기업은 브랜드를 만들지 말고, 브랜드를 키우자

한국 대기업이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일은 브랜드 창업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브랜드가 성장할 수 있는 인프라를 제공하는 조력자가 되는 것이다. 유통망, 제조 설비, 콘텐츠 제작력, 해외 거점 등 이미 확보된 역량을 활용해 신생 브랜드가 안정적으로 실험하고 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 예컨대 글로벌 OEM 생산망을 활용해 브랜드 품질 안정화를 돕고, 유통 테스트 마켓을 제공하거나, 콘텐츠 제작과 글로벌 PR 측면에서 전략적 협업을 시도할 수 있다면, 한국의 ALD도 충분히 나올 수 있지 않을까.


브랜드 스케일업 지원 플랫폼 구축

정부와 산업 유관 기관은 K-콘텐츠 산업이 성장했듯, K-브랜드 생태계 구축을 위한 중장기 계획이 필요하다. 수출 성과나 전시회 중심의 홍보가 아니라, 브랜드 철학, 스토리텔링, 수익 모델, 글로벌 리테일 확장 전략까지 지원할 수 있는 '브랜드 스케일업 펀드 + 육성 인프라' 모델을 고려해보면 어떨까. 이는 패션뿐 아니라 뷰티, 라이프스타일 전반에 적용 가능한 구조이며, 궁극적으로는 '창의성 중심 산업 구조로의 전환'이라는 국가적 비전을 내포할 수 있다.


ALD_뉴욕2.jpg 출처: ALD

한국에도 ALD만큼 창의적인 브랜드는 많다. 이 브랜드들이 스케일업하지 못하는 이유는 철학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 철학을 현실로 구현할 구조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창의성을 중심으로 한 산업 생태계를 새롭게 설계할 때다. 브랜드는 창의성을, 자본은 전략을, 대기업은 인프라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완벽한 성공사례라 볼 수는 없지만, ALD 사례는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다음 ALD가 한국에서 나오지 말란 법은 없다. 단, 그 브랜드가 설 수 있는 무대를 지금 우리가 함께 만들 수 있다면. 마지막으로, ALD의 정체성 중 하나인 나스(Nas)의 데뷔 앨범 「Illmatic」을 떠올려본다.

퀸즈브리지의 청년이었던 나스는 이 앨범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Whose world is this? The world is yours.”
그 세계는 누구의 것인가? 바로 당신의 것이다.


테디 샌티스가 자란 퀸즈의 공기 속에서 흘러나오던 이 문장은, 결국 ALD라는 브랜드 철학의 핵심이자, 오늘날 창작자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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