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상 테이블에서 가장 강한 무기는 숫자가 아니다
지난주, 우리가 매각 자문을 맡고 있는 소비재 브랜드 인수를 검토 중인 기업의 최고 의사결정권자가 직접 사무실을 찾았다. 이미 재무·법률 실사가 마무리된 시점이었다. 남은 건 최종 결정을 위한 마지막 확인 절차, 그리고 경영진 간의 대면이었다. 그는 해당 브랜드를 운영하는 대표를 한 번 만나보고 싶다고 했다. 이미 실사단의 보고는 받았을 것이고, 내부 의사결정 중으로 알고 있던 터라 나도 적잖이 긴장했던 미팅이었다.
그 기업은 국내 제조업에서 확고한 입지를 가진 곳이다. 특정 산업군에서 완제품의 상당 비율을 공급하며 기술력과 납기 신뢰도로 오랫동안 시장의 신뢰를 받아왔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소비자에게 직접 이름이 각인되기 어려운 ‘이름 없는 사업’ 구조를 갖고 있었다. 그가 표현한 ‘이름 없는 사업’은 아마 B2B 비즈니스 모델이 아니었나 싶다.
오너는 오래전부터 이 한계를 인식했다. 사업의 본류와 근본, 그리고 오래 남는 가치를 중시하는 철학은 경영 전반에 깔려 있었고, 한 번 관계를 맺으면 쉽게 끊지 않는 장기 지향적 문화도 거기서 비롯됐다. 2000년대 초반부터는 기존 사업 외에 새로운 축을 만들기 위해 신규 사업을 검토했고, 방향은 기존 제조업, 금융, 그리고 소비재라는 세 가지 축으로 정리됐다.
특히 소비재에 대한 관심은 시간이 갈수록 커졌다. 제조업은 안정적 기반을 제공했지만, 소비자와 직접 접점을 만드는 영역은 아니었다. 그는 소비자가 그 회사의 이름을 기억하게 만드는,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른바 이름표 있는 사업을 원했다.
결정적인 전환점은 몇 해 전 해외 출장에서 찾아왔다. 글로벌 시장을 돌며 한국의 위상이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아졌음을 체감했고, 선진국 시장에서도 소비할 만한 제품이 의외로 많지 않다는 사실을 목격했다. 기술력과 가격 경쟁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을 수 있는 역사와 스토리를 지닌 브랜드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자리 잡았다.
이후 첫 브랜드 인수를 단행하며 본격적으로 소비재 시장에 진입했다. 트렌디한 F&B 브랜드도 검토했지만, 빠른 유행의 교체와 운영의 복잡성을 고려해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한 브랜드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단기 트렌드 브랜드 여러 개보다, 오랜 세월 이어온 역사와 정체성을 가진 브랜드 하나가 훨씬 강한 힘을 가질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이번에 그들이 주목한 대상은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해외 브랜드다. 정통성과 글로벌 인지도, 프리미엄 이미지를 모두 갖춘 데다, 현재 운영팀이 브랜드를 안정적으로 관리해 온 실적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제조·유통 인프라와 브랜드 운영 역량이 결합하면 장기적으로 큰 시너지를 만들 수 있다고 보았다. 이를 위해 전담 법인 설립까지 고려하고 있었다.
의사결정권자가 직접 나선 이번 만남은, 숫자와 보고서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무언가를 확인하는 자리였다. M&A에서 숫자는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거래를 움직이지 못한다. 재무제표와 계약 조건에 적힌 수치는 결과일 뿐, 그 뒤에 흐르는 맥락과 서사가 진짜 이유이자 당위성이 된다. 상대가 왜 이 길을 선택했는지, 어떤 과거와 철학이 그 결정을 지탱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협상의 핵심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와이유파트너스는 이 과정을 무엇보다 중시한다. 상대의 서사와 맥락을 존중하고, 그 안에서 협의의 포인트를 찾으려 한다. 이렇게 찾아낸 이야기는 단순한 참고 정보가 아니라, 협상 테이블의 최우선 순위에 놓이는 전략적 자산이 된다. 숫자만으로는 움직이지 않는 상대를 설득하고, 서로의 목표를 일치시키는 힘은 결국 이 서사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M&A의 본질은 장부를 읽는 눈과 함께, 사람과 기업이 걸어온 길을 읽는 눈을 동시에 가지는 데 있다. 그리고 그 눈이야말로 우리가 협상에서 가장 신뢰하는 무기다.
*1985년, 스티븐 슈워츠먼(가운데)은 리먼브라더스에서 글로벌 M&A 팀을 이끌었고, 로저 알트만(왼쪽)과 프랑수아 드 생팔(오른쪽)은 투자은행 부문을 총괄했다. 1984년 리먼브라더스가 시어슨/아메리칸 익스프레스에 3억6천만 달러에 인수되면서 이들은 보유 주식으로 큰 수익을 거두었으며, 이듬해 슈워츠먼은 피터 피터슨과 함께 글로벌 사모펀드 블랙스톤 그룹을 공동 설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