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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YEU Weekly

밴드를 넘어선 합의, 남은 건 선택의 순간

3시간의 협상 끝, 서로의 서사와 계산이 교차한 자리에서 만들어진 합의

by 정진

지난주, 우리가 매각 자문을 맡고 있는 소비재 브랜드 인수를 검토 중인 기업의 최고 의사결정권자와 첫 미팅을 가졌다. 그리고 어제, 이번엔 우리가 매수자의 사무실을 찾았다. 이번에는 기업가치와 인수조건에 대한 합의를 목적으로 한 자리였다. 그러나 미팅은 예정된 시간보다 40분 늦게 시작됐다. 그의 앞선 일정이 길어졌기 때문이다. 약속된 시각, 그는 내 개인 전화로 직접 사과를 전했고, 도착한 뒤에도 완곡한 사과와 상황 설명과 함께 그의 위트있는 첫마디로 회의를 시작했다.


“이거 기업가치를 많이 깎으려고 잡은 미팅인데, 우리가 먼저 기다리는 상황이 돼야 하는데 말이죠.”


순간 웃음이 터졌고, 긴장감과 부드러움이 오묘하게 섞인 분위기에서 회의가 시작되었다.




이번 거래는 다수의 소비재 브랜드를 운영하는 회사에서, 핵심 브랜드를 전담하는 독립법인을 인수하는 프로젝트다. 법적으로는 별도 법인이지만, 실제 경영관리·온라인사업부·물류 인력과 시스템은 그룹 차원에서 공통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이른바 그레이존에 놓인 이 사업부를 어떻게 분리해 새로운 조직에 온전히 이식할지가 양측 모두에게 큰 숙제로 남아 있었다. 더욱이 핵심 브랜드 외 다른 브랜드들을 계속 운영해야 하는 매도자 입장에서는, 해당 인력들이 잔존법인에 남아야 하는 상황도 동시에 고려해야 했다.


매도자의 첫 번째 관심사는 ‘브랜드의 연속성’이었다. 핵심 브랜드를 매각한 뒤에도 잔존법인을 통해 해당 브랜드의 온라인 유통권한을 유지하고 싶어 했다. 이는 단순히 매출을 확보하는 차원을 넘어, 오랜 기간 구축해온 시장 포지션과 고객 접점을 지키려는 전략이었다. 동시에 현실적인 고민도 있었다. 경영관리, 온라인사업부, 물류 인력 대부분이 잔존법인에 남게 될 경우, 상당한 고정비가 남는 구조다. 매각 이후에도 잔존법인을 운영하며 지속적으로 사업을 이어가야 하는 상황에서, 이 부담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두 번째로, 매도자 오너의 브랜드에 대한 애정은 각별했다. 단순히 재무적으로 좋은 조건에 팔기보다, 인수자가 브랜드를 제대로 운영할 수 있는 계획과 의지를 갖고 있는지가 더 중요했다. 세 번째로, 직원들에 대한 배려가 필수적이었다. 남아 있는 인력뿐 아니라 인수 측으로 넘어가는 인력들의 마음가짐과 사기, 그리고 업계 평판까지 고려해야 했다. 브랜드와 사람, 두 축을 모두 안정적으로 이어가는 것이 매도자에게는 거래 성공의 핵심이었다.


반면, 매수자의 시각은 보다 재무적·전략적이었다. 인수 후 현재 매출의 세 배 이상을 목표로 카테고리를 확장하고 시장을 넓히는 사업계획이 전제돼야 했다. 인수 후 ERP 재구축, 인력 세팅, 기존 조직의 관리·온라인·물류 인력을 그대로 인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PMI에 투입될 시간과 비용은 상당할 것으로 보았다. 인수 금액이 부담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이날 매수자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기업가치 범위를 제시했다. 그들은 초기 LOI에서 출발해 일정 비율 이상을 낮춰야 한다고 판단했지만, 가격 협상에 과도한 시간을 쓰고 싶지 않아 했다. 대신 원하는 수준에서 합의된다면, 매도자가 계속 유사 사업을 영위할 수 있도록 온라인 유통권을 보장하고, 민감한 인력 문제를 함께 풀어나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즉, 가격 합의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그 이후의 실무 협상이야말로 거래의 성패를 가를 것이라는 인식이었다.


우리의 입장에서 이 거래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애초에 이 회사를 Buy-out 펀드로 인수하려 했지만, 자본시장 진출 시 LP 모집에 시간이 많이 소요될 것이라는 판단에 실행하지 않았다. 소비재, 특히 패션 브랜드 시장은 국내 PE 입장에서 FI 투자보다는 M&A에 더 가까운 성격을 가진다. 공급자에 비해 수요자가 제한적이고, 동종 업종 SI를 태핑해도 이 정도 수준의 밸류를 감당할 수 있는 곳은 드물다. 이번 프로젝트가 가능했던 이유는, 매수자가 전혀 다른 산업에서 사업다각화를 노리는 명확한 니즈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미팅에서 매수자의 태도는 매우 합리적이고 신사적이었다. 기업가치 논의와 동시에 매도자의 핵심 관심사인 브랜드 운영의 연속성과 인력 안정을 만족시킬 수 있는 조건을 제시했다. 이는 단순한 숫자 싸움이 아니라, 거래 이후의 관계 설정에 초점을 맞춘 접근이었다. 매도자가 이 조건을 수용한다면, 이후 PMI와 운영계획 논의는 훨씬 원활해질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고 있다.


결국 약 3시간에 걸친 논의와 협상 끝에, 매수자가 제시했던 밴드를 상회하는 수준에서 기업가치에 대한 합의가 도출됐다. 그들이 생각하는 최고가였다. 이제 공은 매수자에게 넘어갔다. 그들이 이 결정을 받아들이고 다음 단계로 나아갈지, 혹은 다시 한번 테이블 위에 조건을 올릴지는 머지않아 드러날 것이다.


leadership_new_V8.jpg 칼라일 그룹 글로벌 리더십. 오른쪽의 이규성 전 대표는 한국계로, 단독 CEO까지 역임하며 글로벌 PE 업계에서 드문 경력을 쌓았다. 출처: 칼라일그룹

결국 M&A에서 중요한 것은 숫자 합의 자체가 아니다. 매수자와 매도자의 니즈를 철저히 파악하고, 그들의 맥락과 서사를 이해한 뒤, 양측이 받아들일 수 있는 지점을 찾아내는 것이 핵심이다. 이 Sweet spot은 단순히 가격이 아니라, 서로의 우선순위와 장기 목표를 반영한 결과물이어야 한다. 어제의 미팅은 가격표를 맞추는 자리가 아니라, 그 가격을 가능하게 하는 이유와 필요를 맞추는 자리였다.


결론은 아직 나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은 숫자가 아니라, 양측 모두가 납득하고 지지할 수 있는 이야기다. 그 이야기가 완성되는 순간, 거래도 자연스럽게 완성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과정을 지켜보며, 마지막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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