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건과 사람, 그리고 워킹그룹의 힘
이번주 협상 테이블에서 드디어 숫자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매수자가 낼 수 있는 최상의 수준에서 기업가치에 대한 합의가 이뤄진 것이다. 당연히 매도자 입장에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처음 논의되던 기준과 비교하면 조정된 수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장의 상황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최근 업계 전반적으로 1분기 실적이 주춤했고, 판매 거점을 확장하기 위해 선제적으로 투입한 자금과 물류센터 이전 비용까지 겹쳤다. 결과적으로 최근 실적은 전년 대비 매끄럽지 못했다.
나는 소비재, 특히 패션 산업은 단순한 재무적 투자자가 들어와 성장을 만들어내는 구조라기보다는, 지금은 전형적인 인수합병 시장이라고 본다. 그만큼 매수자 자체가 많지 않고, 이는 매도자에게는 큰 기회다. 이번 합의는 바로 그 기회를 현실로 만든 순간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다. 합의된 수치가 일방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이후 협상을 통해 충분히 합당하게 느껴지도록 만들어가야 한다. 매수자는 거래 이후 성공적인 온보딩과 통합(PMI)을 염두에 두고 조건을 요구할 것이고, 매도자는 핵심 브랜드를 넘긴 뒤 잔존 법인이 어떻게 자생력을 가질 수 있을지 그림을 그려야 한다.
실제 협의의 장에서는 흥미로운 포인트가 하나 더 있었다. 매수자는 단순히 가격만 이야기하지 않았다. 매각 이후에도 매도자가 일정한 방식으로 유통에 참여할 수 있도록 권한을 보장하겠다는 의사를 보였다. 이는 단순히 재무적 조건을 넘어, 브랜드와 사람의 연속성을 존중하겠다는 신호였다. 매도자에게는 브랜드에 대한 애정과 직원에 대한 책임감이 남아 있었기에, 이런 제안은 의미 있는 균형점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자리에서 이제 우리가 원하는 조건을 정리할 차례라는 메시지를 경영진과 공유했다.
다음 날, 매도자 경영진들과 다시 모였다. 이미 제시된 위탁 판매사 지위 보장 외에 우리가 더 요구할 수 있는 조건들을 하나씩 정리해 나갔다. 회의를 마치며 들었던 생각은, 기업가치라는 숫자는 협상의 문을 여는 열쇠이고, 협상의 본질은 그 문을 통과한 뒤 펼쳐지는 조건의 합의와 합리성 만들기에 있다는 것이다. 매도자와 매수자 모두,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이유를 찾고자 한다. 앞으로 이어질 실무 협상은 바로 그 과정을 밟아가는 과정일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이번 주는 무척 피곤했다. 재무실사에서부터 법무실사 대응, 매수자 측 질문까지, 모든 협의를 내가 주도적으로 끌고 가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재무실사에서는 회계법인 팀의 큰 도움이 있었고, 산업 지식이 필요한 순간마다 전문 파트너의 조언을 들을 수 있었다. 내가 흔들릴 때, 빠르게 자료를 정리해준 팀원도 있었다. 그들의 존재가 없었다면 이번 주는 버티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면 협상 테이블에서 중요한 건 숫자만이 아니다. 내가 잠시 숨을 고를 때도 협상을 흔들림 없이 이어가 준 워킹그룹, 그들이야말로 이번 주의 주인공이었다. 하루 이틀 내가 잠시 멈춰 있어도 이들이 이끌어주는 느낌이었다. 회계법인 파트너는 모든 재무 자료를 숙지하고 협상장에 동행해 질의응답까지 함께 해주었다. 산업 전문가 파트너는 수시로 전화를 주고받으며 소비재 시장 특유의 맥락을 짚어줬다. 팀원은 밤늦게까지 필요한 자료를 챙겨 정리해주었다. 결국 딜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협상의 균형을 잃지 않도록 뒷받침해주는 이들의 힘이 있어야 가능하다.
이번 협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숫자는 합의되었지만, 그것을 합당하게 만드는 조건과 서사를 쌓아가는 과정이 남아 있다. 이번 주의 메시지 역시 동일하다. M&A의 본질은 기업가치 자체가 아니라, 그 가치에 도달하기 위해 양측이 만들어내는 합의와 이야기, 그리고 그 이야기를 가능하게 만드는 사람들의 힘이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