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프라와 분업, 그리고 성장의 속도
이 칼럼은 앞서 다룬 “왜 K-패션은 IPO 시장에서 저평가 받는가”에 이어지는 두 번째 글이다. 첫 번째 글에서 우리는 패션 산업이 자본시장에서 낮은 밸류에이션을 받는 이유를 구조적으로 살펴보았다. 단순히 유행 산업이라는 표면적 이유 때문이 아니라, 인프라 부재와 밸류체인 이해 부족이라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 때문이었다. 이번 글을 통해 그와 정반대로, 한국 자본시장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온 K-뷰티의 성공 요인에 대해 고민해보자. 이는 K-패션이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중요한 단서가 되지 않을까 싶다.
K-뷰티의 글로벌 성공은 흔히 한류의 힘으로 설명된다. 드라마와 K-팝이 세계에서 인기를 얻으면서, 자연스럽게 한국의 화장품도 알려졌다는 것이다. 물론 한류는 중요한 촉매였지만, 그것만으로는 현상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단지 콘텐츠의 힘에만 기대었다면 K-뷰티는 일시적 유행에 그쳤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오늘날 K-뷰티는 글로벌 시장에서 지속적인 존재감을 확보하며, 한국 자본시장에서 높은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그 배경에는 세 가지 구조적 성공 요인이 있었다. 제조 인프라, 산업 내 분업 구조, 그리고 글로벌 확산의 속도다.
제조 인프라: OEM·ODM이 만든 ‘빠른 제품화’
2000년대 중반 이후, 한국에는 세계적인 수준의 화장품 OEM·ODM 기업이 자리 잡았다. 코스맥스, 한국콜마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브랜드가 아이디어만 가져오면 곧바로 제품을 개발하고 생산할 수 있는 체계를 구축했다. 소량 다품종, 짧은 개발 주기가 가능해지면서, 작은 인디 브랜드도 빠르게 신제품을 시장에 내놓고 테스트할 수 있었다. 공장 대신 팬을 가진 브랜드는 고정비가 아니라 속도로 확장한다.
이 점은 K-패션과 결정적으로 다르다. 패션 브랜드는 여전히 생산과 공급망을 직접 챙겨야 하는 경우가 많고, 글로벌 스케일에 맞는 전문화된 제조 인프라가 부족하다. 반면 K-뷰티는 산업 차원의 인프라가 이미 갖춰져 있었기에, 브랜드가 창의성과 마케팅 역량만으로도 세계 시장에 도전할 수 있었다.
산업 내 분업: 브랜드는 브랜딩, 제조는 생산
K-뷰티의 또 다른 성공 비밀은 분업의 정착이다. 브랜드는 제품 기획과 브랜딩, 마케팅에 집중하고, 제조사는 생산을 맡는다. 이는 단순한 역할 분담이 아니라, 리스크와 비용을 최소화하는 구조적 해법이었다. 브랜드가 생산시설을 직접 운영할 필요가 없으니 초기 자본 부담이 줄고, 실패했을 때 손실도 제한적이었다.
이런 구조 덕분에 수많은 인디 브랜드가 등장했고, 일부는 글로벌 히트작을 만들며 빠르게 성장했다. 투자자 관점에서 보면, 이는 기업가치의 중요한 요소다. 분업 구조는 브랜드의 고정비를 낮추고, 변동비 중심의 비용 구조를 가능하게 한다. 이는 곧 수익성 예측 가능성을 높이고, 안정성을 강화한다.
글로벌 확산 속도: 디지털과 한류의 결합
마지막으로, K-뷰티는 속도를 무기로 삼았다. SNS의 등장과 함께, 뷰티 브랜드는 인플루언서 협업, 바이럴 콘텐츠, ‘Before & After’ 영상 등을 통해 소비자와 직접 만났다. 이는 단순한 마케팅을 넘어, 제품의 효과를 직관적으로 증명하는 방식이었다.
여기에 K-팝과 K-드라마가 더해지면서 K-뷰티는 글로벌 시장에 빠르게 침투했다. 패션에 비해 사이즈, 물류, 재고 리스크가 적었던 것도 확산을 가속화했다. 투자자 입장에서, 이는 성장률(g)의 상향 요인으로 작용했다. 결과적으로 K-뷰티 기업은 상대적으로 낮은 할인율(r), 높은 성장률(g)로 평가되며 높은 멀티플을 인정받았다.
에이피알(APR)은 K-뷰티 성공 방정식을 잘 보여주는 기업이다. 메디큐브와 널디는 각각 뷰티와 패션을 아우르며 빠르게 성장했다. APR은 OEM 인프라를 활용해 신제품을 빠르게 출시했고, SNS 기반의 팬덤을 만들어냈다. 동시에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선명하게 구축하며 글로벌 시장에서 존재감을 키웠다.
이 과정에서 눈여겨봐야 할 점은, APR이 단순히 “마케팅이 잘 된 브랜드”가 아니라, 한국 뷰티 산업이 가진 구조적 장점을 최대한 활용한 기업이라는 사실이다. APR의 성장에는 OEM·ODM 인프라, 분업 구조, 디지털 마케팅이라는 K-뷰티의 3대 성공 요인이 모두 작동하고 있었다. 즉, K-뷰티의 고멀티플은 문화가 아니라 운영체계의 결과다.
첫 번째 칼럼에서 다룬 바와 같이, K-패션은 여전히 저평가 문제에 직면해 있다. 반면 K-뷰티는 높은 평가를 받으며 글로벌 시장에서 입지를 넓히고 있다. 두 산업의 차이는 단순한 유행 주기의 문제가 아니다. 인프라와 분업의 유무, 그리고 글로벌 확산 속도의 차이다.
K-패션이 글로벌 무대에서 제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이제 산업 차원의 인프라 구축과 협력이 필요하다. 브랜드 창업자의 철학과 디자인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OEM·ODM 수준의 전문화된 생산, 유통, 물류 인프라가 뒷받침되어야만, 개별 브랜드의 P×Q–C 구조가 개선되고, 자본시장에서 합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다.
K-뷰티의 성공은 우연이 아니다. 산업 차원의 인프라, 브랜드와 제조의 분업, 디지털을 통한 글로벌 확산이라는 세 가지 축이 맞물리며 만들어낸 구조적 성과였다. 그리고 이 구조적 성공은 자본시장에서 높은 밸류에이션으로 이어졌다.
앞선 칼럼에서 우리는 K-패션의 저평가를 문제로 제기했다. 이번 글은 그 대조적 사례로 K-뷰티의 성공 요인을 다루었다. 그렇다면 다음 글에서는 관점을 브랜드 경영으로 돌려보려 한다. 브랜드의 대표가 어떤 철학을 가져야 하고, 어떻게 팬덤을 만들며, 밸류체인을 이해하고 최적화할 수 있는지가 곧 글로벌 확장의 열쇠다. 결국 산업 구조의 차이를 넘어, 브랜드를 어떻게 경영하느냐가 한국 패션의 미래를 결정짓는 핵심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