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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진 Jan 20. 2024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40대 중반을 향해 달려가는 금융시장 동갑내기 친구 셋이 오랜만에 모였다. 증권사 ECM본부에서 일하는 R본부장, 한남동 고급주거단지 WM센터 P팀장, 그리고 사모펀드에서 일하는 나. 마지막으로 봤던 게 작년 6월이었으니 우리는 반년 정도 주기로 모이는 듯하다. 서로의 경력도 17-8년 정도 되다 보니 이제 딱 총 사회생활의 절반을 채운 듯하고, 어느새 팀장, 임원이 되어 있았다. 




오늘은 증권사 ECM본부에서 일하는 친구 본부장 승진을 축하해주기 위한 자리다. 우리 셋은 MBTI로 따지면 I로 태어나 사회생활을 통해 스팀팩으로 E패치를 장착한 케이스라 서로 비슷한 성향이다. 땅불바람물마음 다섯가지 힘을 하나로 모으면 딜은 클로징 할 수 있다는 로망(당위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래도 현실감각은 있는 사람들이란 표현이 적절하겠다.  


미주구리 세꼬시에 소주가 들어가고 살짝 눈이 풀릴 때 즈음 본부장으로 승진한 친구가 운을 띄었다. 


"나 그만둘 것 같다." 


띵 했다. 우리는 그 동안 R 본부장과 내가 서로 검토 중인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고액자산가들을 상대하는 P팀장이 투자자 관점에서 앵글을 맞춰주는 티키타카식의 술자리를 즐겼고, R 본부장 영전에 힘입어 전투력이 상승한 본부와 협업할 생각에 나도 기분이 들뜬 상태였다. 그런데 승진을 하자마자 그만둔다고? 이후 필름이 끊겨서 수많은 대화가 흐린 기억속의 그대이지만, 간략한 스토리는 이랬다.  


본부장 승진을 하고 성공적인 안착을 위해서는 본부원들과 약 5년 정도의 시간을 앞만보고 달려가야 한다는 판단이 들었다. 조용히 실행력이 강한 R본부장의 마음을 돌리려는 K전무의 끈질긴 설득이 시작됐다. 그러나 5년 후 50대를 바라보는 나이가 된다고 생각하니 오래전 내 회사를 갖고 싶다는 목표가 자꾸 생각이 났다. 어차피 한계까지 나를 끌어가야 하는 이 상황, 차라리 이 열정을 내 회사에 쏟아보면 어떨까?  


승진 전부터 12년 정도 알고지낸 후배들이 새 회사를 설립해 R 본부장의 조인을 설득 중이었다. 그러다 R본부장이 승진과 함께 후배들의 회사에 지분을 투자하고, 대표이사 자리로 이동을 결정 한 것이다. 외벌이 인지라 아내의 허락을 받는 게 일 순위였고,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 최소 생활비를 정해 뒀다고 한다. 소위 말하는 쩐주 없이 독립계 기관전용사모펀드 회사를 시작하는 것은 상당히 멋지고 용감한 일이다. R 본부장이 이런 결정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사람들이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믿을 수 있는 사람들. 


문득 바라보게 된 자리 옆에 둔 환기의 에세이

취해가는 와중에 R 본부장은 애덤 그랜트의 기버(Giver, 자신의 이익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야기를 하더라. 본인의 성향 상 기버의 삶을 좇는 것이 편안했다고 한다. 자본시장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오며 매처(Matcher, 받은 만큼 주는 사람)와 기버를 처음에 명확히 구분하기는 힘들었지만, 테이커(Taker, 주는 것보다 더 많은 이익을 챙기려는 사람)는 확실히 알아볼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정도로도 새로운 회사의 실패 확률을 상당히 줄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우리 셋 삶의 철학은 각자 조금씩 달랐지만 어렴풋하게 일로서가 아닌 인간으로서 서로를 위했기 때문에 마흔을 훌쩍 넘겨서도 서로 보고싶고 궁금한 관계가 되지 않았을까.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환기는 모든 것을 알았군. 증권사에서 사모펀드에서 각자 임원으로 비슷한 듯 다른 길을 갈 것 같았던 친구가 내 동행자가 되었네.  


Welcome to the jungle R본부장. 너의 미래를 응원하고 함께한다.    



Welcome to the jungle, we got fun and games. We got everything you want. - Guns N' Ros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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