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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약초콜릿 Dec 23. 2019

1.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프랑수아즈 사강이 마약 투약으로 기소되면서 남긴 말,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단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한에서다.


 그녀는 정말 선한 사람이었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주체의식을 사용하겠다는 고집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다.


보통 우리 주위에는 태연하게 타인에게 해를 입히는 것은 물론 악의를 갖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치들이 넘친다. 직장에서, 학교에서, 가정 내에서처럼 직접 연관을 갖는 이들에게서부터 처음 보는 타인에게서까지 피해 양상과 범위는 다양하다.


그렇다면 먼저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를 구분하는 게 필요할 듯하다.

지인과의 관계에서 어쩔 수 없이 치뤄야하는 피해라면, 어떤 면에선 피해라고 보기 어렵다. 언젠간 되돌려 받거나 혹은 내가 가해자로 역관계가 설정되는 순간을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꾸준히 관계가 유지되어야 하는 사이에선 기브 앤 테이크의 순서 문제로 볼 수 있다.(이 또한 일방향으로만 형성될 소지가 다분하긴 하지만 대다수는 상처든 도움이든 주고받기 마련이다.) 정말 심각한 피해는 은연중 갑자기 보는 피해다.


 민폐라고 일컬을 수 있는 이 피해는 불시에 불특정이라서 예방이 불가하다.

대중시설 이용 시 새치기당하기, 양심 없이 버린 오물 밟기, 수면에 들려고 하면 날아오는 발망치 층간소음. 이중 어느 것은 가해자를 향해서 정정을 요할 수 있지만 어느 것은 아예 직접 대면도 어렵다. 이런 경우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상당한 고통에 시달린다.


 쉽게 말해, 공중도덕 기본 매너를 갖추지 못한 몇몇의 불량 행실이 다수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다.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고 영화 킹스맨에서 그렇게 외쳤어도 누군가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다.

영화에서도 매너를 중시하는 걸 보면 사회가 존재하는 어디든 비매너에 무매너인 구성원들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는 증거나 다름없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이런 무례한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방법은 정녕 없는 걸까? 가장 쉬운 방식으로는 나 자신도 그들과 똑같은 짓을 감행하는 것이다.


 감행이라는 것은 계획과 용기를 지니고 과감하게 행하는 것이다.

내가 당한 피해를 누구에게든지 되갚아주고 싶다면 사용해도 되는 해결책이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란 속담이 괜히 생겨난 게 아닐 것이다.


 그런데 대다수 우리는 이런 하급수를 자처하길 원치 않을 뿐 아니라 용인하질 못한다.

자신에게 눈살 찌푸리게 만드는 밑바닥이 있다는 걸 견뎌낼 수 없는 것이다.

세련되고 정중하고 고등교육을 수료한 사람이 마땅히 지녀야 하는 덕목을 어려서부터 수혈받은 대다수 우리들은 그저 무례를 속으로 비웃거나 피할 도리밖에 없다.



 그런데 만약 오 헨리의 경관과 찬송가에 등장하는 소피와 같은 무례한을 발견한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오갈 데 없는 소피는 추운 겨울을 조금이나마 아늑하게 보내려고 꼼수를 낸 것이 철창행을 자진한다.

3개월 정도의 수감기간까지 고려하여 적당한 경범죄를 경관 앞에서 저지르기로 하고 감행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때만큼은 행운(?)이 따라주는지 체포 되질 않는다.


 소피가 계획을 실행하는 과정에선 분명 크고 작은 손해를 입은 선량한 이들이 있었으나 그들이 어떻게 손실을 보전했는지는 중요한 일로 묘사되지 않는다.

물론 법에 의존하지 않고 소피에게 폭력으로 되갚아 준 피해자도 있지만 일부다.


 현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소피와 같은 특수 목적을 갖고  온갖 민폐를 저지르기로 작정한 당사자가 흔치 않겠지만 과연 폐를 끼치는 이들이 무심결에 몰라서 행했다고 볼 수 있을까?


 글쎄, 몇몇 부류를 제외한다면  실수로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래서 도덕심을 내재한 다수가 묵인하고 넘어가지만 이 또한 해법이 되진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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