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나를 믿지 마세요.

by 한약초콜릿

컨디션을 회복하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젊음의 복원력은 이럴 때에도 참 쓸모가 있다. 통증이 말끔히 사라지고 나니 일회성 발병으로 별것 아니었다고 치부하게 되었다. 살다보면 겪곤 하는 신체의 불편함 정도랄까. 무탈해지고 나니 자연스럽게 뻔뻔해졌다.


며칠 체중을 재지 못해 은근히 불안했다. 섭취한 것이라곤 말간 죽이 다였는데 설마 찌진 않겠지 했다. 바람대로 늘진 않았지만 병치레한 것을 감안한다면 노여울 만큼 하나도 빠지지 않았다. 체중 숫자는 나를 설레게 했던 47.8 그대로였다. 다행이다 싶다가 돌연 걱정이 앞섰다.


제대로 먹지 않아 빠진 살이고 죽으로만 속을 달랬는데도 변동이 없다면 지금을 최저무게로 봐야하나? 앞으로 먹는 양을 늘리면 도로 쪄버린다는 걸까? 이대로 유지하려며 평생 저녁식사와는 담쌓고 살아야해?


급기야 내 인생이 조화가 깨지고 균형을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 어지간해선 뚫리지 않는 콘크리트 벽과 대면해서 먼저 닳아 없어지는 쪽이 패하는 내기를 시작한 것 같았다. 콘크리트 벽과 무슨 수로 내기에서 이길 수 있단 말인가? 절망감이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 살이 빠져도 고민과 불편함은 형태만 바꾸고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적합한 해결책을 누구에게라도 하소연해서 받아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더욱이 엄마는 더 이상 내가 다이어트 한답시고 끼니를 거르면 몽둥이질이라도 거침없이 할 태세여서 예전의 먹성 좋은 딸로 되돌아가야했다. 사방이 나를 가로막는 지뢰였다.


그래서 결심했다. 지금 모습을 최선을 다해 즐기고 아름답게 꾸며주기로. 다시는 볼 수 없는 모습이라면 훗날 사진을 쓰다듬으며 온화한 미소라도 지을 수 있도록 추억으로 쌓겠노라 마음먹었다. 그러자 촉박해지고 바빠졌다. 도로 살이 오르기 전에 예쁘고 마감이 뛰어난 좋은 옷들을 실컷 입어보고 사진으로 남길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았다. 당장 쇼핑센터로 달려갔다. 돈은,,, 개의치 않기로 했다. 내가 보유하고 있던 자금이 많아서가 아니라 엄마카드로 우선은 변통할 예정이었다.
추후 알바를 하거나 아니면 먼 훗날 직장을 잡아 첫 월급을 받으면 고이 엄마께 드릴 웃기지도 않는 계획을 세웠다. 당시 엄마는 딸인 내게 지나친 신뢰를 가져서 용돈을 현금대신 본인 신용카드로 내주셨다. 한 달 용돈으로 30만원 내에서 쓸 수 있는 일명, 엄카는 사용한도가 그보다는 훨씬 컸다. 내가 언제고 맘먹으면 오버해서 결제할 수 있는데도 엄마는 순전히 날 믿고 맡기신 것이다. 그런데 내가 차디찬 배신을 계획까지 세우며 예정하고 있었다.


아무리 간이 부었어도 백화점 고급매장을 둘러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저층에 집합한 여성 캐릭터 브랜드들은 한눈에 봐도 멋지고 부티가 나는 것들이어서 눈길을 끌었던 건 사실이지만 굳이 스무 살 꽃띠인 내가 그것들까지 영접할 필요는 없어보였다. 그리고 그때는 비싼 것 하나보다 중저가 여러 개로 쪼개는 게 효율적이라 믿었던 시기다. 자연스럽게 내가 향한 곳은 여성 캐주얼과 유니섹스 캐주얼이 한데 모인 층이었다. 발랄하고 생기가 돌게 하는 귀여움과 여성스러움 로맨틱과 이지 스타일을 손쉽게 찾을 수 있는 그곳에 당도하자 가슴이 신나게 쿵쿵거렸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멜로디도 나의 흥분을 북돋았다.


나는 곧장 진 브랜드가 모인 코너부터 찾았다. 엄마의 영향인지 어려서부터 청바지만 줄기차게 입어왔던지라 단연 내게 으뜸인 아이템은 청바지가 되어있었다. 원단 혼용율과 워싱 기법에 따라 표현하는 이미지가 급선회되는 청바지는 언제나 나의 관심에서 멀어지지 않았다. 그중 가장 입어보고 싶었던 브랜드가 게스 진이었다. 역삼각 한 중앙에 갈고리처럼 ‘?’이 붙은 로고는 신비에 대한 상상을 자극시켰다. 아주 유명한 ‘캘빈과 나 사이엔 아무것도 없어요’ 라며 뇌쇄적으로 속삭이는 카피문구를 도형화한 것처럼 비췄다.

당시 줄곧 유행하던 부츠컷과 스트레이트 형태를 밀어내고 떠오른 새로운 세력은 스키니 진이었는데 말이 많았다. 동양인 비율에는 적합하지 않아 외려 종아리를 짧고 굵어보이게 한다는 것과 다리 곡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는 발상이 선정적이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지배적 이미지를 고려했는지 게스 진은 너무 적나라하지 않는 스트레이트에 가까운 스키니를 생산했다. 거기에 색감은 아주 진한 인디고로 조금은 더 다리를 날렵하게 보이게끔 했다. 그리고 허리를 비뚜름하게 기울이고 골반을 앞으로 밀어 자신감 있는 여성성을 극대화시킨 마네킹이 한가운데서 주력상품을 입고 뽐을 내고 있는데 발길이 닿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상품은 볼 것도 없이 내처 매장으로 들어가 마네킹을 가리키며 옷을 내어달라 말했다.


“사이즈는요, 손님?”
직원이 내 몸을 슬쩍 훑고 물었다.


흠, 사이즈라... 가지고 있던 청바지들이 허리 27인치짜리들이었으니까 26인치면 되겠지?


살이 빠졌으니 어림짐작으로 26인치를 부탁했다. 왠지 모를 쾌감이 감돌았다. 26인치 청바지는 화보에 나오는 모델핏을 구현하기에 안성맞춤 사이즈인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때까지 내가 알던 가장 작은 치수의 청바지는 26인치였다.


탈의실에서 헐거워진 치노 팬츠를 벗고 새 옷을 입을 마음의 준비로 허릿단에 붙은 택을 확인했다. 사이즈는 올바른지 원단 혼용률은 무엇인지 가격은 얼만지 눈으로 읽는 것이 그것이다. 면과 스판덱스로 짜진 원단은 손으로 잡아당겼을 때 탄탄하면서 유연하게 늘어났다 놓으면 복원됐다. 두께감은 살짝 두꺼운 편이었는데 이래야 울퉁불퉁한 다리곡선을 감추는 데 유용하다. 가격은 18만원이 넘는 그다지 저렴하지 않은 가격이었다. 대학입학선물 중 하나인 리바이스 16만원 상당 부츠컷 바지보다 2만원이 더 비싸 나도 모르게 비싸네, 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대중적 청바지 브랜드 티비제이나 잠뱅이를 가면 5~6만원 구입할 수 있는 상품들이 즐비했던 것에 비하면 결코 싸지 않았다.
더구나 돈벌이도 못하는 학생신분에서야 더한 체감이었다. 그래도 꿋꿋하게 입어봤다. 다림질과 여러 가공을 마친 새 옷을 입을 때면 어김없이 느껴지는 뻣뻣한 마찰력이 이상하리만치 조금도 생기지 않았다. 바지를 허리까지 끌어올려 지퍼를 올리고 단추를 채웠을 때에야 이유를 알았다. 바지가 내게 컸다.

팝콘나무??


어찌됐든 탈의실 밖에 나가 거울에 비춰보는 게 급선무라 어중간한 핏이 연출된 바지를 입은 채 거울 앞에 섰다. 가까이 다가온 직원이 사이즈는 어떤지 물었고 내가 여유롭게 벌어진 허리 앞단을 보이며 좀 크다며 민망한 얼굴을 보였다. 그러자 직원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럼 25사이즈 입어보시겠어요?”


뭐라고? 25? 26보다 작은 청바지가 있어?


내겐 획기적인 소식이었다. 드디어 21세기가 되니 청바지 사이즈에서도 변혁이 일어났구나 싶었다. 이미 수많은 여성들이 26청바지 사이즈에 몸을 맡길 수 없을 만큼 말라있다니. 그렇다면 그간 나는 얼마나 날씬한 몸매와 거리가 먼 채로 살아왔다는 것인가? 살을 빼고 보니 부러워만 했던 마른 세상은 더 마르라고 부추기는 입김 센 놈이 지배하는 세상이었다. 어안이 벙벙해진 채 도로 탈의실로 밀려들어온 내 손엔 한 치수 작은 같은 옷이 들려있었다. 착용하기 전에 눈높이까지 들어 펼쳐봤다. 표가 나게 사이즈가 작았다. 겨우 1인치 차이치고는 눈에 띄게 원단소모량이 적었다. 1인치가 그토록 큰 차이라는 걸 실감나게 해주는 차이였다. 1인치는 결코 겨우, 라는 말로 폄하해선 안 되는 차이였다.


다시 거울 앞에 선 내 모습은 좀 전과는 확연하게 다른 늘씬하고 다리가 곧은 피사체가 반사되었다. 백화점 마법거울의 속임수도 한 몫 했지만 과연 잘 맞는 사이즈를 착용하니 옷태가 달랐다. 내가 익히 아는 다리 길이와 맵시를 보기 좋게 보정한 효과가 보였다. 마음을 빼앗기고도 남은 뒤였다. 나아가 직원은 바지 디자인의 장점을 나열했다. 특히, 뒤 포켓 디자인에 공을 들였다며 바탕색과 보색을 이루는 실로 포켓가장자리에 스티치를 놓아 힙이 훨씬 볼륨 있게 상단에 위치한 착시로 다리를 길어보이게 만드는 데 부족함이 없다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난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에도 판매직원이 자신이 다루는 상품에 대해 뚜렷한 특장점을 꿰고 있는 걸 중시했다. 상품설명을 듣는 것도 구입가에 포함됐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반면 교환이나 환불을 요구할 땐 뒤통수가 뜨거워지는 걸 피할 수 없다.) 쇼호스트들의 열띤 판매설명이 그 방증 아닌가? 또한 설명을 듣다보면 상품 필요의 유무를 판단할 수도 있음이다. 그런데 거의 모든 물건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건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다.


이러한 연유로 내 생에 최초로 매장에서 판매되는 가장 작은 사이즈를 구매하는 기념비적인 쇼핑일이 되었다. (그 후로 얼마가지 않아 해당브랜드에서 24사이즈가 출시되는 바람에 기념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여기서 멈췄어야 했거늘 무슨 객기인지 직원이 어울릴 것 같다며 권하는 상의를 대어보며 비취색 니트와 얼룩말 무늬 쫄티를 덥석 물어 엄카로 시원하게 결제하고 매장을 나왔다. 지금이야 카드 승인이 떨어지자마자 sms가 울리지만 그때는 서비스가 만연하지 않은 때라 엄마가 모를 수밖에 없는 나의 일탈이었다. 다시 생각하니 참 행복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