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도 게임과의 싸움이구나
올해 중2가 되는 우리 장남은 어렸을 때부터 또래 친구들보다 키도 몸무게도 항상 작은 편이었다. 친구들은 초딩 때부터 나타나던 이차성징도 이제야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다. 물론 초6 때는, 집에 머무는 시간이 전보다 많아진 셀프 휴직 중인 엄마와 자주 티격태격하고, 정수리에서 오묘한 냄새를 풍겨 청소년 샴푸를 쓰고, 머리를 기르고 싶다며 안 자르려고 하니 버티고 버티다 결국엔 끌려가 미용실에 가게 된 지는 좀 됐지만 엄마 느낌상 본격적인 사춘기는 아직 안온 것 같다. 여전히 기분이 좋을 때면 엄마를 안아주기도 하고 사랑한다고 말해주며 엄마 뽀뽀도 거부하지 않고 풍경이 멋진 곳에 가면 엄마와 셀카를 찍고 싶어하기도 하는 아들이기 때문이다. 조만간 어떻게 돌변할지는 모르지만, 사춘기마저 더디게 오는 아들이 순하고 착해서 자랑스럽고 다행이다는 마음도 있다.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면 마치 아빠와 아들처럼 보이는 우리 꼬꼬마를 보고 있으면 속상하고 답답하기도 하면서도 결국에는 자기 속도에 맞게 알아서 클 것이라 믿으며 고기를 열심히 먹이고 일찍 재우며 기대하며 기다리는 중이다.
가족여행으로 일본 도쿄로 가게 되었다. 일본 여행을 좋아했던 우리 부부는 아이가 만 4세 일 때도 데리고 도쿄에 간 적이 있다. 8월 말 성수기, 도쿄를 가는데 아이와 함께라면 필수코스라고 여긴 도쿄 디즈니랜드에 가서 덥고 습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좋은 엄마 아빠가 되기 위해 미키와 함께 사진을 찍어주고 놀이기구 줄 서서 태우고 손잡고 열심히 데리고 돌아다녔는데, 9년이 지난 지금, 기억이 전혀 안 난단다. 그럼 그렇지 싶다가도 아깝기도, 속상하기도 했다. 이제는 나중에 커서도 기억할 만큼 컸으니 이왕이면 이번 여행이 아들에게 평생 좋은 기억으로 아니 행복한 그 느낌만이라도 남을 수 있도록 아들이 원하는 것을 웬만하면 다 들어줄 것을 남편과 함께 다짐했었다. 운동에 관심이 많은 아들은 방학 전부터 좋은 축구화와 탁구채를 갖고 싶다며 노래를 부르곤 했었는데, 떼쓰면 크리스마스 때 산타할아버지가 선물 안 주실 거라고 귀여운 협박을 하듯, 노력하고 열심히 (공부)하면 일본에 갔을 때 선물 사줄 것이라는 약속이 중딩 아들에게 약발이 통했다. 피곤하여 아침에 못 일어날 때도, ‘빨리 일어나야 일본 가서 선물 사주지’라고 한마디만 하면 상황 끝. 벌떡 일어나서 드림렌즈를 알아서 척척 빼고 스스로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여행 당일, 여유롭게 인천공항에 도착하여 공항 내에서 식사도 하고 커피도 마시고 면세점 구경도 하고 화장실도 가고 동생이랑 놀아주고 했는데도 비행기 탑승시간까지는 한참 남아있었다. 심심하니 게임을 시켜달라는 장남. 여행 오기 전, 일본에 갔을 때 공부는 어떻게 무엇을 시켜야 할지 고민을 하고 있으니 남편은 무슨 공부냐고 그냥 실컷 놀게 해 주라고 했다. 이왕 좋은 기억으로 남길 바라는 행복한 여행을 위한 시간이니 아무것도 안가져가겠다고 동의를 해놓고선, 막판에 수학 학원 숙제와 그것만으로는 성에 안차 얇은 책 한 권을 몰래 챙겨놓았던 철두철미한 나란 엄마. 수학 숙제를 하루치라도 하면 게임을 풀어준다고 하니 바로 집중력을 발휘한다.
방학을 맞이해서 막내를 등원시키고 집으로 돌아오면 장남과의 둘만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공부를 봐주고 있으면 거의 매일을 투닥거리고 싸우고 사과하고 화해하는 오전 시간이다. 안해야지, 참아야지 하면서도 보고 있자니 꼬라지가 맘에 안 들어 꾹 참다가 결국 하게 된다. 수위 조절이 안되어 폭발하고 나서는 죄책감에 빠질 것을 이미 잘 알고 있는데도 수위 조절이 안 된다. 아들은 아들대로 얼마나 그 잔소리가 듣기 싫을까. 그나마 이 지긋지긋한 오전 시간을 서로가 버틸 수 있는 것은, 학원이 매일 한 시 반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아들도 매일같이 늦지 않게 후다닥 준비해서 나가는 걸 보면 집보다 바깥이 나은가 보다. 이제 그 시간부터 둘째가 하원할 때까지는 엄마의 소중한 자유시간이 시작된다. 아들 앞에서는 못 보던 유튜브도 보고 빵과 커피도 마시고 책도 읽고 마음껏 혼자만의 행복 가득한 오후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근데 없다. 여행을 오니, 나만의 시간이 없다. 게다가 사춘기를 맞이한 아들은 호르몬 변화로 인함이 확실한 결코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그가 이미 예전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종일 함께 하면서 제대로 알게 되버린 것이다. 그의 감정의 파도를 온종일 감당하기에는 내 그릇이 너무나도 작았다. 오락가락하는 감정의 기복을 겪고 있는 아들의 언행을 사랑으로 이해해주고 싶다가도 도가 지나치고 지나치게 자주 찾아오는 그 파도에 남편과 몇 번을 '쟤 왜 저래?' 하는 마음을 절레절레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눈빛을 교환했다. 게다가 나를 아주 미치게 만든 건 게임 생각 밖에 없는지, 지하철을 타거나 줄을 서거나 하여 틈만 생기면 게임을 풀어달라고 졸라댔다. 게임을 시켜달라는 말은 이미 나의 분노 방아쇠인데, 조르고 있는 그 얼굴을 보니, 그의 앞머리가 두 눈을 가릴 정도로 긴 모습에 더욱 분노가 끓어 올랐다. 이러는 녀석이 여행 중에 일본어를 쓰고 싶어해서 만나는 모든 일본 사람들에게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리가또~ 고자이마스(고맙습니다)"를 어찌나 해대던지. 나중에는 어이가 없었다. 그렇게 고맙다고 인사도 잘 하는 예의바른 녀석이 엄마 아빠한테는 왜 이러니?
게다가 평상시에 그렇게도 예뻐하는 8살 어린 동생에게 누구보다도 얄밉게 굴었다가 혼냈다가 정색했다가 귀찮게 하다가도 또 뒤돌아서면 동생이 예뻐 물고 빨고 하고 있다. 둘이서 호날두 선수의 세레머니를 하면서 어찌나 잘 노는지 모른다. 아무리 봐도 수준이 비슷해 보이는 둘은 깔깔깔 웃으며 신나하고 동생은 때론 형아의 몸짓에 존경의 눈빛을 보낸다.
나의 사춘기는 어땠는지 생각해보면 기억에 있는 게 딱 하나 있다. 중학교 2학년 여름에 엄마와 교회 집사님 가족과 다섯 명이서 대만 여행을 갔었는데, 이유 없이 엄마한테 계속 짜증을 냈었던 기억이 난다. 뭐가 그리 불만이었는지 엄마한테 막 뭐라 했다가 또 예뻐 보이고는 싶어 평상시에 안 입던 연두색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되게 예쁜 줄 알고 착각하고 대만을 활보하고 다녔던 기억도 난다. 엄마는 물론 교회 집사님 부부도 뭐라 말은 못 하고 내 눈치를 보셨는 것도 기억나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 아들들은 사춘기가 없었다는 시부모님의 간증을 듣고도 안 믿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사춘기는 원래 다 겪는 거 아닌가? 시부모님의 미화된 아들 자랑이라고 생각했는데, 본인이 생각해도 사춘기가 없었던 것 같다는 남편 말에 놀랍기도 하고, 요새 우리 아들이 지랄거리는 걸 보면 속으로 뜨끔뜨끔하다. 날 닮아서 저러나.. 지랄총량의 법칙이라고 하던데.. 남편에게는 이 공식이 적용이 안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대만에서의 나를 생각하면 우리 아들의 지랄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기에.
마지막 밤, 장남과 함께 둘이서 돈키호테로 쇼핑을 하러 나가는 길에, 그날 산 후드티를 입고 길을 나섰다. 후드를 뒤집어 쓰며,
“나 너무 귀엽지 않아?”
(음, 그 앞머리나 올려줄래)
“응, 맞아~ 귀여워. 그 옷이 맘에 드는구나”
“응”
학원 선생님도 도대체 어떻게 키우셨냐며 놀라는 높은 자존감을 가진 아들이다.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아들, 이번 여행은 어땠어?"라고 물었다. 혹시라도 '별로'라는 답이 나올까봐 쿨하지 못하게 질척거린다.
"축구화 사서 좋지?!!"
다행히도 너무 좋았다는 답이 돌아왔다.
아들아, 이 시기를 잘 보내서 너가 멋지게 성장할 수 있도록 따뜻한 마음으로 격려할 줄 아는 현명한 엄마가 되도록 노력할게. 지금까지도 훌륭하게 잘 커줘서 고마워. 이미 충분해. 아들.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