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여행 편(2)-
성시경 오빠가 말씀하셨다, 모든 걸 훌훌 버리고 제주로 떠나라고.
그래서 다녀왔다, 바로 그 제주.
어느 10월의 멋진 날, 김포공항은 북적거렸다. 이른 아침 집합하고, 혹여나 아이들이 집에 신분증을 두고 올까 봐 미리 걷어놨던 신분증과 (전날, 아이들 신분증을 까먹고 내 신분증만을 챙겨가는 악몽을 꿨었다) 티켓을 나눠주고, 짐을 부치고, 우리 반 학생들 전원이 검색대를 무사히 통과하여 이제야 정신을 차리고 한숨 돌린다.
“얘들아~ 자, 모여봐. 사진 찍자! 하나, 둘, 셋!”
“......”
내심 기다리는 말이 있었는데, 아무 반응이 없다.
“그럼, 각자 구경하다가 좀 이따 게이트 앞에서 보자.”
수학여행을 가기 싫은 세 번째 이유, 외로움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맙소사, 제주도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럴 줄은. 옹기종기 다 같이 모여있는 모습이 뭔가 귀엽고 ‘우리’라는 느낌이 들어서 어렸을 때부터 줄곧 학급 단체 사진을 좋아했었다. 내가 지들을 찍어줬으면 “샘도 들어와서 찍으세요~!”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이래서 수학여행 가기 싫다고 한 거야. 이 무심한 놈들. 그렇다고 같이 찍자는 말을 먼저 꺼내는 것은 뻣뻣한 내가 다리를 일자로 찢는 것과 같은 일이다. 커피가 필요했다. 공항 내에 있는 카페는 아메리카노가 오천원이 넘어서 망설였지만 그래도 마셔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마침 발견한 편의점. 이천육백원으로 카페인 충전을 했다.
드디어 제주도에 도착하여 천지연폭포에 갔다. 몇 학생들은 폭포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다른 학교에서 온 여학생들 구경에 정신이 팔려있다. 우리 반을 향해 또 외친다.
“얘들아~ 사진 찍자!”
예의상, 두, 세 장 더 찍고, 내심 또 기다린다. 아까는 공항 안이었고, 이제 여기는 제주도 아닌가?라는 생각에 또 기대하고 말았다. 혼자만의 생각이었지만. 딱히 할 일이 없어서 다른 반을 살짝 훑어보니 이번 여행은 3개 조로 나뉘어서 움직였는데, 같은 A조인 또 다른 (나보다 10살 어리고 예쁜) 여자샘이 바로 내가 원하는 그 단체 사진을 찍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둘러싸여서. 역시 어리고 예뻐야 하는구나. 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지. 아마도. 제주에서의 첫날, 결국 내가 나온 사진은 한 장도 못 남겼다. 하지만 밤 11시에 캔디처럼 씩씩하게 아이들 인원 체크를 하러 호텔 방을 돌아다녔다. 어이없게도 몇 아이들은 왜 호텔 밖으로 못 나가게 하는지 못 나가게 할 거면 술을 사달라며 불만을 터트렸다. 그중 누군가는 자기 담임이 여자샘이라 힘이 없어서 못 나가게 한다고 생각하더라.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데 어느샌가 (나보다 10살 어리고 예쁜) 같은 조 여자샘 가방에 한라봉 모형의 열쇠고리가 달려있었다.
“샘~ 이거 우리 반 학생이 사줬어요.”
“와, 저도 예전에 학생이 프랑스로 국제교류 가서 파리 텀블러 사다 준 적 있는데.”
얼굴이 화끈거렸다. 예쁘네요, 좋겠네요 그 쉬운 한마디를 못 하고 옛날 옛적 아주 잠시였지만 나에게도 그런 사랑과 관심을 받아본 시절이 있었음을 내뱉고 말았다. 그 순간 10년 전에 받은 텀블러는 왜 생각이 났는지. 맹세컨대 이 선생님과 사이가 안 좋은 것도 절대 아니다. 오히려 잘 지내고 있기에 이번에 같은 조가 된 것인데, 평상시에 착한 척 대인배인 척해왔던 것이 무너져버렸을 뿐만 아니라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속 좁은 나의 모습이 툭 나와버려서 매우 당황스러웠고 더욱 민망한 것은 이왕 할 거면 당당하게 할 것이지, 자랑은 하고 싶고 민망스럽긴 해서 완전 개미 같은 목소리로 옹알거린 것이다. 차라리 그녀에게 아예 아무것도 안 들렸길 바란다. 몇 살을 더 먹어야 내가 받은 텀블러가 아닌 내 존재만으로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려나.
김포공항에 돌아와서도 그녀는 그 반 학생들에게 인형을 받아 좋아하고 있었고, 하필 난 그 모습을 목격하고 말았다. 수화물을 찾으려고 기다리고 있는 정신없는 와중에 다른 반 학생이 디지털카메라를 들고 오더니 영어선생님(남자샘)과 사진을 찍어달라고 공손히 부탁한다. 이렇게나 사람이 많은데, 왜 하필 나한테. 그 학생은 디지털카메라 조작법을 모르는 줄 알고 친절하게도 조작법을 가르쳐준다, “이렇게 살짝 누르시면 초점이 잡히시고요, 좀 더 세게 누르시면 사진이 찍혀요.” 어, 나 다 알아. 나 디카 세대야 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태연하게 사진을 찍어줬다. 그 학생은 제2외국어 중 일본어 선택자라 나도 가르치고 있는 학생이라는 점이 살짝 씁쓸했지만.
웃픈 상황도 있었지만, 함께 한 A조 선생님들 모든 분이 너무 따뜻하셨고, 성산일출봉에서 바라본 우리나라가 너무나도 눈이 부셔 그 풍경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는 귀한 2박 3일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수고 많았고, 아무도 아프지 않고, 다치지 않고 무사히 잘 다녀와 줘서 고맙다고, 월요일에 학교에서 보자고 단톡방에 남겼더니 몇 명이 공감하기 버튼으로 하트를 꾸욱 남겨주었고, 그러고 나서 달리기 시작한 댓글들. 이모티콘 하나 없는 담백한 ‘수고하셨습니다’.
이게 뭐라고 무지 고맙고 피로회복제를 먹은 듯하다.
하트 3개
댓글 8개
그렇게 나의 학교생활은 이어진다.
뒷이야기
돌아와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반 친구들이 첫날 15명이나 호텔 밖으로 몰래 도망갔다가 걸린 사건으로 담임선생님이 시말서 써야 한다고 살짝 겁을 줬더니 그것을 진짜로 생각한 몇 남학생들이 미안하다고 인형을 사준 거라고 한다. 말은 안 듣지만 미워할 수 없는 귀여운 녀석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