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여행 편(1)-
성시경 오빠가 말씀하셨다, 모든 걸 훌훌 버리고 제주로 떠나라고.
오빠 말을 잘 들어야 예쁜 동생이다. 그래서 다녀왔다, 바로 그 제주.
담임교사로서 학생들과 함께 수학여행에 간다는 것은 많은 책임감이 따르기에 피하고 싶은 법이지만, 올해 수학여행지를 들었을 때부터는 생각이 달라졌다. 육아와 집안일에서 공식적으로 해방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학교 예산으로 무려 제주도에 갈 수 있다니. 코로나 팬데믹 시절, 너도나도 제주행 티켓을 끊어대던 그때 나도 그 비행기에 오르고 싶었다. 일부러 휴가철을 피해 10월에 다녀온 지인, 제주에서 무려 한 달 살기를 한다는 막내 친구네 가족까지. 부러움에 몇 번이고 제주를 검색했지만 떠나지 못했던 건 때아닌 특수를 맞아 치솟아버린 제주도의 살인적인 물가였다. 기간제 교사로 일한 지 11년 만에 처음으로 1년간의 달콤한 셀프 육아휴직을 마치고 다시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기 전, 즉 지난 겨울방학에 기간제 교사 초빙 공고가 나면 빨리 새로운 학교를 정해놓고 여행을 가려고 했었다. 통장에 꼬박꼬박 들어올 월급을 생각하니 이제 일본에라도 다녀올 수 있는 자격이 된다고 생각했다. 어느 도시로 가면 좋을지를 고민하고 있었는데, 현실은 2월까지 면접을 보러 다녀야 했고, 그러다가 3월 새 학기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대로 ‘여행을 가고 싶어요 병’에 심하게 걸리고 말았다.
학생들과 함께 가는 수학여행이라도 좋으니 가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여름휴가로 내 생애 처음으로 방문한 전주 한옥마을에서의 시간으로 인해 그 증상이 호전되기 시작했다. 거기에 10월 초 연휴에 갑작스럽게 떠나게 된 강릉. 자연의 힘은 위대했다. 버킷리스트 중에 하나였던 원 없이 동해 바다 실컷 바라보기를 실천함으로 코로나 때부터 시작되던 그놈의 ‘여행을 가고 싶어요 병’이 싹 다 완치된 것이다. 연휴가 끝나자마자 2학기 중간고사가 있었고 직후인 10월 둘째 주에 제주도로 떠나는 일정이었다. 드디어 성시경 오빠의 말을 잘 듣는 예쁜 동생이 될 기회가 왔는데, 그리도 간절했던 여행을 가고 싶다는 생각이 풍선이 펑 터지듯 사라진 것이다. 오빠 말 잘 듣는 예쁜 동생이 되려면 아직 한참 남은 걸까.
“아, 가기 싫다.”
수학여행을 가기 싫은 이유는 첫째, 담임교사로서 주어지는 책임감이 막중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세월호 순직 기간제선생님께서 당하신 차별을 생각하면 도대체 왜 수학여행을 가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되고 화가 날 정도로 속상하다. 반 아이들이 다치기라도 하면.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다. 둘째, 술, 그놈의 술 때문이다. 남학생들이라 평상시에 술을 안 마시던 학생들도 마시고 싶어 한다는 것을 이미 수군거리는 걸 듣고 알고 있었다. 방을 돌아다니며 소지품 검사를 하고 술을 뺏고 못 마시게 하고 실랑이하고. 화내며 씩씩거리는 얼굴 이모티콘이 떠올랐다. 우리 반은 진로시간에 모든 학급에 들어가시는 학년부장 선생님께서 수업 진행하기에 가장 힘든 반이라고 인정해 주신 반이다.(개성적인 아이들이 많다고 해두자) 뭔가 사건이 터질 것 같았다. 남자 선생님들은 수학여행에 가서 남학생들과 한 잔씩 주고받아도 그것이 아름답게 포장이 되는 경향이 있지만, 여선생님이 같은 행동을 하면 이상한 선생님이 되어버리는 점도 불공평하게 느껴진다. 혹시 몰래 가져온 술을 뺏게 되면 그 술은 어떻게 해야지. 버리는 건 아까운데. 일어나지도 않는 일을 혼자 생각하며 벌써 지치곤 했었다. 그래도 어찌 됐든 우리 반 학생들에게 술로 인한 사고가 나면 안 되는 거다. 공항에서의 시간 단축을 위해 각 학급별로 절반은 짐을 들고 비행기에 타고 나머지 학생들은 수화물로 부쳐야 한다고 해서 바로 우리 반 학생들의 사진 명렬표를 쫙 훑어봤다. 에잇, 요주의 인물들이 홀수에도 짝수에도 죄다 퍼져있네. 액체류(술)는 기내 반입이 안 되기 때문에 차라리 모두의 짐을 수화물로 부쳐버렸으면 좋겠는데, 그건 또 비행기가 무거워져서 비행기가 뜰 수가 없다고 한다. 학생들이 술을 가져갈 생각을 아예 못 하게끔 기내에 짐을 들고 탈 친구들이 홀수일지, 짝수일지를 당일 아침에 공항에서 알려줄 거라고 했다.
언제나처럼 밝고 상냥한 사람이라는 가면을 쓰고, 샘은 너희를 믿는다는 마음을 담아 눈빛을 발사한다. 면접 시 남학생들을 잘 못 다룰까 염려하시던 교장 선생님께 자신 있게 아들이 둘이나 있어 문제없다고 어필을 했었지만(이때만큼 내게 아들 둘이 있다는 사실이 쓸모 있었던 적이 없다) 사실 남학생들을 다루기는 여전히 수학의 정석처럼 쉽지 않기에 오늘도 최민준 선생님(아들교육전문가)의 지혜를 빌리러 간다. 우리 반 학생들은 담임이 ‘남자 고딩들 길들이는 방법’을 아들 육아서에서 연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