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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구슬 Apr 03. 2022

10. 에필로그

또 다른 곳으로 항해하기에 앞서

제주 동쪽 한 달 살기를 이틀쯤 남겨두고 있던 어느 하루에는 뉴스에서 태풍급의 강한 비바람을 예상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날 아침 늦게 브런치를 먹고 오후엔 집에서 쉬고 있었다. 나는 주로 쉴 때는 이층 거실에서 일을 했는데, 이는 이층 테라스와 연결되어 있었다. 이 층 테라스는 내 방만큼이나 넓은 공간이었는데, 지붕 없이 3면이 자연을 향해 트여있고 바닥은 나무로 구성되어있었다. 문득, 이층에서 테라스 밖을 바라보니 시원해 보였다. 여분으로 남아있던 이불을 다 싸서 테라스로 나갔다. 그 전날 애월에서 산 책을 펴고 누웠다. 재밌었다. 누워서 하늘을 보니 상쾌하고도 편안했다. 태풍이 오기 전 3월 제주의 테라스는 바람이 시원하고, 해는 구름에 가려 눈부시지 않아 휴식하기에 최상의 공간이었다. 문득 자유로운 기분이 들었다. 이게 사람 사는 거지.

예전의 나였다면, 이런 일탈(?)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먼저, 바깥(?)을 나가지 않으려고 했을 것이며, 이불을 테라스 바닥에 펼쳐 눕는 행동은 비상식적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나 스스로를 규정하던 어떤 틀이 깨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런 파격으로 인해 심신이 모두 편안했다. 아무렴 어때, 내가 좋은데. 제주 한 달 살기를 통해서 자연과 공간을 느끼고, 사람을 배우고, 동물과 어울렸다. 그러한 경험들이 나를 좀 더 여유롭고 자연친화적이고 단순한 사람으로 만들었을지 모른다. 때론 매우 대담해진 것 같기도 하다. 나는 나의 이런 변화가 좋다.


돌아가는 배에서 우리는 한일고속훼리 골든 스텔라호 펫 룸을 이용했다. 원래 이용 예정이었던 실버 스텔라 호가 갑자기 수리일정에 들어가서 배가 변경되었는데, 여행에 꽤 익숙해진 친구들이 많이 타서 펫 룸은 마치 강아지 유치원 같았다. 이렇게 매너가 좋은 강아지들과 그들을 사랑스럽게 보살피는 가족들을 보니 흐뭇해졌다. 집에 돌아가서도 휴일에는 쿠와 함께 반려동물 동반 가능한 곳을 많이 찾아다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같이 다니면 얼마나 좋아? 쿠도 덜 외롭고. 그리고 어떻게 하면 반려동물이 좀 더 사회에 자연스럽게 어우러질 수 있을지, 궁리를 하게 된다.

(화목 + 사랑스러움으로 가득했던 한일고속훼리 골드 스텔라호 펫룸. 케이지가 넓은데도 꼭 철창에 끼여서 바깥 구경해야 되는 쿠 회장님 카트에 모시고 도착한 펫룸에서 자유롭고 즐거운 항해 )


집에 도착해서 여독을 조금 풀고 나니, 내 방이 눈에 들어오는데, 너무 어지럽다. 한 달 살기 물건이 거의 다 들어있는 택배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음에도 방에는 물건이 차고 넘쳐난다.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당분간은 꼭 필요하지 않은 물건은 사지 않아야겠다 마음먹었다. 제주에서는 한정된 물건으로도 잘 지냈다. 예를 들면, 제주에서는 최소한의 의복으로만 생활하고 편하게 지내자 마음먹은 것도 있지만, 내 옷장을 보니 사회생활에 필요한 이상으로 옷들이 넘쳐난다. 학용품이며, 가방이며 나열하자면 부끄러울 지경으로 얼마나 과했는지 모른다. 한 달 살기 이전의 내가 더 살 궁리만 했다면, 이제는 이미 가진 것을 더 잘 쓸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조깅을 했다. 어느샌가 우리 동네에도 매화와 벚꽃과 개나리가 활짝 피었다. 꽃에 자세히 다가가서 보고 있는 나를 보니 웃긴다. 이전에는 "꽃이 뭐가 그렇게 좋은가? 나는 몇몇 꽃 이외에는 크게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하고 꽃을 스쳐 지나가기 마련이었다. 제주에서 자연을 가까이하다 보니, 꽃이 왜 아름다운지 그 답을 알았다.  꽃이 핀다는 것은 생명력이 넘친다는 것이다. 죽음은 어디에나 있지만 갖 태어난 생명은 활기차고 희망적이다. 그리고 그 생명을 깃들게 하는 따스함은 겨우내 움츠러들었던 생명들의 영혼에게도 큰 위로가 된다. 그리고 그런 자연을 본받고 가까이하는 내 마음에도 꽃이 피게 된다. 꽃은 참 아름다운 존재다.


탈색을 했던 미용실에서 다시 검은색으로 염색을 했다. 엊그제 탈색했던 것 같은데, 벌써 다시 한 달이 지나서 검은색으로 염색을 하고 있다니, 선생님도 나도 시간이 참 빠르다고 느꼈다. 새로운 직장에 가서 출근 날짜를 잡았다. 아 이제 다시 시작이구나. 아쉽지 않냐고 주변에서 많이들 물었다. 하지만, 잘 모르겠다. 필연적으로 나는 이곳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래서 한 달은 앞으로의 삶에서 어떻게 살아야 될지 힌트를 주는 선물 같은 아름다운 시간이었고 충분한 시간이었다.

내 다이어리의 3월 달력.


추억을 담은 기념품이 가득해진 나의 공간과 어김없이 내 옆자리를 지키는 기특한 쿠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제주 한달살이의 경험이 기획한 바와 같이 오래도록 힘이 되어주길 바라며... 퇴고와 수련의 시간을 좀 가져볼까 합니다. 다시 만나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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