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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구슬 Apr 01. 2022

9. 아직도 나는 너를 공부한다.

섬에서 함께 한 달 살기

높은 곳에 있는 에어컨을 닦으려고 의자 위로 올라갔다가 잘못해서 떨어져 버렸다. '쿵'하는 소리가 나고 팔꿈치가 어디에 부딪혔는지 아팠다. 그랬더니 문 앞에서 누워있던 하쿠가 깜짝 놀라서 나를 쳐다본다. 아픈 김에 침대에 뛰어들어 기절한 척을 했다. '톡'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쿠가 침대 위로 올라온다. 어느새 내 눈 바로 앞에는 하쿠의 걱정 어린 눈동자가 보이고 가늘고 긴 흰 수염이 내 뺨을 간지럽힌다. "아이고 우리 하쿠 누나가 걱정됐어?" 대견해서 안아주려고 두 팔을 벌렸지만, 쿠는 공간을 빠져나가 입을 헤 벌리고 장난을 친다. 그리고 눈빛으로 대화한다. "크게 안 다쳐서 다행이야."

사람은 서울로 보내고, 말은 제주도로 보내라는 말이 있다. 쿠는 말은 아니지만, 제주도에 와서 더 똑똑해지고, 의사소통 능력이 매일매일 향상되는 것 같았다. 부모님은 아침 일찍 여행을 떠나셨는데, 내가 늦게까지 자고 있으면 발톱으로 머리를 긁기도 했다. 쿠는 보통 원하는 바가 있으면, 가까이 와서 엉덩이로 누르거나 코를 붙이거나 하는 편으로 그렇게까지 직접적인 표현을 하는 일은 드물었다. 제주의 쿠는 매우 의사표현이 명확하다. 계속 나를 주시하거나 자꾸 데려가라고 머리를 긁고, 품에 파고든다. 내가 해석하기로는 "누나. 엄마 아빠 다 나갔어. 우리는 왜 안나가?" 하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면 빙그레 웃음이 지어지고, "귀여운 쿠. 그래 우리 나가볼까?" 하게 된다.

사실 하쿠는 본성이 많이 살가운 편은 아니다. 나랑 비슷해서 흥미로운 것에 관심과 호기심이 많지만, 생각보다 수줍을 때가 많고, 흥미가 빨리 식어 남들이 보기엔 어렵다고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제주도에서 쿠는 삐짐, 기쁨, 요구, 행복 , 편안함과 같은 감정표현이 늘어났다. 제주의 건강한 기운과, 매일매일 붙어있으면서 서로를 아껴주는 것에 적응이 된 모양이다. 천상 여행 강아지였다.

(좌)눈나보고 나가자고 설득 해볼래요?/(우)쿠의 여행용품. 칫솔이 사진에서 빠졌지만 세상 단촐하고 귀엽다.
협재해수욕장. 귀여운 우쿨레레 연주가 이어졌던.

본 집에서의 쿠는 사회성이 많이 부족한 편이었다. 친구를 만나면 반가워 하지만 그 만남을 길게 이어가지 못했다. 하지만, 제주에서 만난 수많은 여행견들의 도움으로 쿠는 친구를 만나면 어떻게 다가가야 하고, 어떻게 자신의 반가움을 표시하는지 점점 배우게 되었다. 여행자와 여행견들은 대개 훌륭한 태도를 가지고 있다. 점잖고 착한 강아지들과 사랑스러운 미소로 다가오는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쿠는 친구 사귀는 데에 익숙해졌다. 도시의 강아지들 또한 사랑으로 보살핌을 받지만, 도시에는 위험 요소가 많아 만남에 있어 항상 주의할 필요가 있다. 반면, 제주의 여행견들은 섬의 기운을 받은 탓인지, 보다 여유로웠다. 사람에게도 친근하고 서로를 알아가는데 좀 더 자연스러워 보였다. 특히나 돌아오는 배에서 우리는 펫 룸을 이용했는데, 이용객들이 꽤 많아져 흡사 강아지 유치원 같았다. 하지만 이제 여행에 익숙해진 작은 천사들은 가족을 따라 얌전한 일등 승객의 태도를 보였다. 이제는 사람과 말뿐만 아니라 강아지도 종종 제주에 다녀와야 할 듯하다.

싱계물공원과 더리트리브에서의 쿠. 그리고 중간사진은 그냥 말 안듣는 쿠

그럼에도 쿠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우리 가족이라는 것을 제주 한 달 살기를 통해 느꼈다. 쿠의 눈빛은 여행 내내 우리를 향한다. 때로는 완강한 고집(유명한 시바 고집)을 부리기도 하지만, 우리를 꼭 필요로 한다. 밤이면 탁탁탁 소리가 나는데, 쿠가 2층으로 올라오는 소리다. 쿠는 잘 때가 되면 꼭 우리의 옆자리로 온다. 그리고 자다가도 내가 어딘가로 향하면 모든 주의를 기울인다. 여행의 마지막 날이 다가와서 짐을 싸놓으면 자기를 잊고 데려가지 않을까 봐(세상에!) 꼭 가방 옆을 지키곤 했다. 그는 아마 평소에도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여행의 여유 덕분에 쿠의 이런 귀여운 구석을 많이 훔쳐볼 수 있었다. 세상 사랑스러운 존재에게 사랑받는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 것은 매우 행복한 일이다. 사실, 쿠뿐만이 아니라 엄마 아빠도 한 달 동안 같이 여행을 하다 보니, 새로 알게 된 구석이 있었다(예를 들면 엄마는 생각보다 여리고, 아빠는 생각보다 많이 부지런하시다.). 가족은 이미 다 알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아직까지도 나는 그들을 공부해야 할 듯하다. 그리고 가족과 함께 여행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은 매우 감사한 일이다.

집에갈때 나 꼭 데려가! 잊으면 안돼~!!(언제 떼어놓은 적도 없는데 왜이러는지 모르겠는 쿠)
쇠소깍 주변 항구에서

# 서로 배우고 추억을 쌓게 해 준, 제주 한 달 살기 보금자리.

제주 동쪽은 오후 6시 이후에는 정말 적막강산이므로 우리는 집에서도 꽤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 공간은 여행이 무르익어감에 따라 더욱 아늑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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