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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ibueong Oct 06. 2021

오랜만에 쓰는 입고 메일.

북페어가 끝난 후, 가부터 시작하는 마음으로.

북페어에 다녀왔다.

2021년 1월에 나온 시집과 2021년 4월에 나온 에세이를 모두 입고하겠다는 책방지기님 덕에

오랜만에 입고 메일을 다시 보내게 되었다.


1월의 나. 얼마나 정성스러웠는지,

담담한 글에서 느껴지는 설렘과 떨림이란. 한 뼘도 안 되는 그 작은 글에서 스르륵 지나가는 추억들이란.


4월의 나, 조금의 여유를 찾은 건지

텀블벅 성공 후, 자신감 있게 써 내려간 글들이 보인다.

목업 이미지도 만들 수 있게 되었고, 본문을 조금 발췌해 내용 소개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창작물 덕에 정말 좋은 사람들을 만났고, 정말 좋은 기회들을 많이 만났다.


새로 경험하는 것들, 새로이 깨닫는 것들이 너무나 신기하고 행복해서 울컥한다. 내가 모르는 이런 풍경이 있었구나, 나는 이런 것도 할 줄 아는 사람이구나,
나는 이런 걸 좋아하는 사람이구나, 내가 마주한 이 풍경 속엔 누군가의 숨은 시간과 노력이 있겠구나...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내가 지나온 순간들이 알 수 없는 누군가의 노력, 많은 우연 그리고
행운이 얽혀 가능했던 것임을 깨닫는다.

물론 내 인생에 행복만 그득했던 것은 아니지만.


작은 책에 얼마나 많은 노력과 수고가 담기는 줄 미리 알았다면 시작하지 않았을 거란 생각도 든다.

실제로 현재 역시 책 만들기가 힘들어 같이 만들 사람들을 찾고 있으니.


어제도 기록했듯 내가 희미해져도 내 조각들이 글로 남아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나의 의지마저 희미해지더라도 내 이성은 글 속에 남아 반짝였으면 좋겠다.
누군가에게 기억된다는 것, 내가 나를 지워도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는 것.     
써야겠다. 평생을 써야겠다. 내 기억들을, 내 조각들을 영혼의 움직임을 미세하게 담아서 기록해야겠다.
머리를 땋을 때처럼 한 가닥을 남겨두어 누군가 단서 삼아 나를 찾을 수 있도록.
울림은 사라져도 빛은 희미하게 남을 수 있도록.


가방에서 시작된, 작은 하늘색의 시집을 계기로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지금의 내가 왜 여기에 서있나 생각해 보면 결국 '내 안에 있는 조각들' 때문이었다는 걸 오랜만에 다시 편 책에서 보았다.


지금의 나는 전주를 뛰어넘는 거리들을 거리낌 없이 운전하게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내 차는 더욱 오래 사용한 범퍼카가 되었다.


10개월 혹은 그전부터 있었던 작은 시작들에 기반한 우연들이 모여, 이제는 10년을 바라보는 큰 꿈이 생겼다.


 글이 책과 사진을, tv와 음악을, 술과 말을 대체했다. 나는 앞으로도 어른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여행하고 부단히 쓸 것이며 항상 글과 함께 할 것이다.


놀랍게도 이제는 영상을 끝까지 보는 것이 너무 힘들다. 글은 술술 읽히는 데 비해 영상에 집중하려면 꽤 많은 집중력이 필요하다.


 둘째는 나에게 쓰지 않으면 미치는 사람도 있다며 꼭 나에게 계속해서 쓰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웃기게도 반 고흐와 그의 동생 테오가 생각났다. 물론 나는 알아서 돈은 나 살만큼 벌고 있지만. 반 고흐처럼 끊임없이 내가 보고 느낀 것들을, 머릿속을 활보하는 생각들을 끌어내어 글로 풀어내겠다고 다짐했다.    
 ‘좋았다’ 한마디로 감상을 끝내던 이의 여행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어떤 생각을 했는지, 그 느낌은 어떤 색채였는지 자세하고 구구절절하게 풀어내었다. 멈추지 못하는 머리와 손으로 쓴 기록이 누군가에게 잠시나마 행복한 렌즈로 기능했으면 좋겠다.


말은 여전히 버벅거리고 글은 훨씬 편해졌다. '잘' 쓰는지는 모르겠지만.


요즘의 나는 굉장히 혼란스럽다. 원인이 결과인지 결과가 원인인지 자꾸 헷갈린다.  문학을 하려면 필연적으로 나의 슬픔을 길게 늘여 구구절절하게 써 내려가야 하는 건가 싶고, 이러다간 내가 눈물바다로 영영 떠내려 가버릴 것만 같아 간신히 붙들고 있는 중이다. 물론 글을 써야만 한다는 건 알고 있으며, 글과는 이제 떨어질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잘하고 있다고 말해주는 이가 없어 슬픈 밤이다. 잘하고 있다고 말해주어야 할 사람은 분명 나인데,
내가 나를 끊임없이 그리워하니 나는 평생 슬플 운명인 건지.


어떤 사람은 나에게 정말 힘겹게 글을 쓸 거라고 했다. 돈이 되지 않을 거라고 했다.

어떤 사람은 또 나에게 글을 쓰는 것도 좋지만 우울감이 들 거라고 했다.


쓰나 안 쓰나 우울은 종종 나에게 들이닥치고, 나는 항상 힘겹게 글을 쓰고 또 책을 만든다.


웃긴 건 여기서 '글을 쓰다'를 '삶을 살다'로 바꾸어도 별 무리 없다는 것이다.


그저 사는 동안 우울은 종종 나에게 들이닥치고, 나는 항상 힘겹게 살아가고 무언가를 이뤄낸다.


쓰는 삶을 살고, 삶을 쓰며 산다. 그래서 삶은 서럽고 고달픈 것이 정답인가 보다.

그래도 한 번 사는 삶,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고 했으니. 이렇게 글과 함께 즐거이 살아야지.


종종 이렇게 멈추어 서서 예전의 내가 썼던 글을 보며 울고 웃으며 행복하게 살아야지, 지금처럼.


경로를 조금 이탈해서 낯선 풍경 속으로 들어가는 나에게 쓰는 편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내가 되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경로를 이탈하여 재탐색하는' 나에게.


항상 그랬던 일상에서 경로를 조금만 이탈하면 새로운 풍경이 나오는데 이 풍경도 수많은 우연들과 행운들이 얽혀 만들어진 기회라고 생각하면 어찌나 경이롭고 고마운지.
역시 모든 일들은 한 번에 딱 생기는 것이 아니라 티끌 같은 우연들이 얽혀 생기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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